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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Apr 27. 2024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연수가 있어 청으로 향했다. 차를 몰아 한재터널을 지나자 너른 바다가 차창 너머로 펼쳐졌다. 연수 시간이 임박하자 나는 초조하게 악셀을 밟았다. 한낮의 도로는 대중교통과 트럭, 세단과 보행자들로 북적였다.

가까스로 제시간에 도착한 후,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연수가 막 시작한 참이었다. 천장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가 흘러나오고, 참석자들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정면에 있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지나간 후, 가방을 손에 쥔 채 엉거주춤 손을 올리며, 나는 묘한 삐딱함을 마음에 품었다.

요새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와 더불어 일련의 절차가 행해진다. 특히, 공무직에 해당하는 직업군에 속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관례로 자리 잡은 이러한 절차는, 그러나 호르몬의 분비가 왕성한 20대 중반에게는 어떤 표독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케케묵은 파시즘적 잔재가 아직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꼴이라니.’ 넣어 입은 셔츠와 슬랙스 차림에 구두를 신은 채로 나는 소위 ‘국민성’을 부여하는 의식에 조소를 보내며, 그러나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엉거주춤 손을 올리고 내렸다.

일체의 관습적 문법은 모두 허울뿐인 가식이라며 침을 뱉고, 집단주의를 혐오하며 개인을 통제하려는 그 모든 움직임을 수작이라 칭하던 혈기왕성한 대학생은 불과 몇 년 후 공무직 직장인이 되었고, 그 누구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 정신을 요구받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이런저런 제약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삶의 곳곳에 파고들며, 그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비교적 평온하며 불편함 없이 흘러간다. 출근길에 가방을 손에 들고 어깨와 허리에 힘을 준 채 꼿꼿이 걸을 때면, 완벽히 사회의 규준에 적응한 나라는 사람에 대해 문득 낯섦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생각했던 미래가 이런 것이었나. 안주한 그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경멸하며 냉소를 보내는 상상 속의 내 모습은 마치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흐릿해져 갈 뿐이다.

최근 읽었던 유하 시인의 시집이 머릿속에 남는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그의 시는 삶에 보내는 조소이자 냉소다. 삶을 신성시하는 태도에 침을 뱉고, 고급 예술을 경멸하며 양식과 외피를 일소에 부치는 그는, 과거 세운상가로 대표되었던 복제품과 포르노, 싸구려 예술과 번다한 폐품들 속에서 삶과 예술을 발견한다. 그의 시에서 엑스터시와 모텔, 소쩍새와 쳇 베이커, 세카와 비틀스는 한데 섞인다. 그 혼돈의 중심부엔 처연한 욕망이, 저열한 질투가, 자기 파괴의 욕구가 자리한다. 또한, 그러나 그럼에도 숨을 붙들고 있는 현재의 공허와 권태가 뒤섞여 있다.

집에 돌아와, 씻고 스피커로 노래를 재생한다. 라디오헤드의 <Creep>이 흘러나오고, 나는 침대에 널브러진 채 몸을 파묻는다. 귓가에 웅웅거리던 국민의례 연주곡은, 곧이어 열등감에 사로잡힌 소년의 처절한 넋두리에 묻힌다. 모범적인 사회 구성원은 셔츠를 벗고 다시 기성 관습을 조소하는 풋내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일이 되면 다시 셔츠 깃을 매만지며 밖을 나설 것이다. 변한 것은 없으며, 날아가는 새와 달리 나는 날개가 없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2014)의 결말에서, 리건(마이클 키든)은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추락이 분명한 상황에서, 딸인 샘(엠마 스톤)은 아래가 아닌 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영화는 추락과 비상이 공유하는 순간의 매혹을 통렬하게 꿰뚫는다. 파멸에 닿을 때에 느끼게 되는 공포와 더불어 해방감, 야릇한 쾌감은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를 찍게 하고,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그리고 호르몬의 잔향이 남아있는 청년에게는 그들이 남긴 것들을 좇도록 한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유하의 시집을 꺼내든다. 책을 펼치니, 각진 잿빛의 창 너머로 휘파람새 둥지가 넘실거린다. 새는 날아가고, 힘찬 날갯짓에서 나는 동시에 추락의 필연성을 본다. 그 필멸의 존재에 나는 어떤 위안과 전율을 느낀다. 욕망과 집착, 공허는 그렇게 휘발하고 생겨나기를 반복하며, 랭보의 시구처럼 권태는 더 이상 내 사랑이 아니다.



매혹의 고통은 종종
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
하여 나의 질투는 공기보다 가볍다
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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