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필요(2024) 영화 리뷰(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어는 왜 만들어졌을까? 물론 구글링을 하면 몇 분 지나지 않아 무수한 논문들과 함께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쉬운 방법으로는, 챗GPT에게 물어보는 경우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마음껏 상상할 자유가 주어진다. 인터넷은 잠시 꺼둔 채, 한 번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인류 초기에, 본능의 충돌은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을 것이다. 처음엔 간단한 몸짓. 그러나 손과 발을 허우적대면서 이들은 무수한 오해와 갈등을 경험했을 것이다. 결핍은 창의성을 불러일으키므로, 답답한 인류는 곧이어 효과적인 소통의 방식을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숱하게 굴리기 시작한다. 무수한 노력 끝에 언어라는 하나의 그림을 발명해 낸 인류는, 이후 각자의 감정과 본능, 욕구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그림들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용과 형식이 짝을 찾아가고, 이러한 공식은 약속으로 언표 되어 집단 내의 단일한 기준으로 정착하게 된다.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만으로도 손쉽게 생성 가능한 언어는, 이후 무한히 증식하며 곳곳에서 남발되기 시작한다.
어느덧 언어는 삶에 너무나도 익숙해진다. 어린아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언어는 무수한 갈래로 뻗어나간다. 사용 방식 역시 입과 손발, 펜과 모니터, 키보드 등 다양화되기 시작한다. 점차 인류는 가시적인 언어를 세계의 본질이라 여긴다. 언어화되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생각과 감정의 발현 수단으로서 생겨난 언어는, 되레 생각과 감정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언어의 외부에 있는 것들은 존재를 부정당하기 시작한다. 감정은 이성이라 일컬어지는 언어화된 세계 바깥으로 추방당하기 시작한다.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2024)는, 밀려난 비언어적 존재들을 여행자로 표상한다. 프랑스에서 온 여자(이자벨 위페르)는 현지인들에게 불어를 가르친다. 그녀의 교수법은 정통 언어 학습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그녀의 질문은 학생들로 하여금 비정형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며, 그녀는 그들의 내밀한 감정을 기록하여 읽고 학습하도록 시킨다. 내면 깊숙한 곳의 비언어화된 감정을 끄집어내는 그녀만의 방식은, 그녀가 시라는, 역시 비가시적인 감정을 언어로 포착하는 문학에 끌리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한 여행지는 언어의 법칙을 추동한다. 남자(하성국)의 엄마(조윤희)는 아들이 나이 많은 외국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아들을 다그친다. 그 여자에 대해 물어보라고. 질문을 통해 그 여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그 여자를 느낄 수 있다는 아들의 말에 엄마는 분노한다. 비언어적인 감정을 그녀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의 눈에 그 여자는 수상한 외국인 여행자일 뿐이다. 그리고, 남자는 엄마에게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하는 데 실패한다.
발전하고 다양화된 언어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한다. 말 한마디에 서로가 신뢰를 보내기도 하고, 끝없는 의심의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한마디 말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한 순간에 사람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합리주의와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는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도록 부추길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존재 이전에 인간의 감정과 욕망, 본능과 사유가 있었다. 언어는 물론 효과적인 표현 수단이지만, 이러한 언어가 인간의 존재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언어는 인간 존재의 세계에 찾아온 여행자이며, 여행지에서 그는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부지런히 시를 쓰고 말을 익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