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양>(2022)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찻잎이 흔들린다. 깊은 뿌리에서 태동해 굳센 줄기를 거쳐 얇은 가지 끝에 자생한 잎이 바람에 산들거린다. 들판에 핀 꽃이 흔들리고 바람이 일렁인다. 정지된 철골과 목재 건물들 안팎에는 존재들이 있다. 인간과 동물, 로봇과 복제인간. 생명이 흔들리고 그들의 노래와 춤사위가 흔들린다. 존재가 찻잎처럼 가벼이 부유하며, 무질서하게 움직인다.
흔들리는 모든 것들은 끝내 소멸한다. 멜로디는 점차 불협화음이 되어 잠잠해지고 춤 동작은 서서히 잦아든다. 육신은 마모되어 부패하고 꽃과 나무 역시 삶을 다하며 썩어간다. 흔들림은 필멸을 전제하기에, 인간은 흔들림에 불안을 느낀다. 황금비율을 찾아 완벽한 노래를 작곡하고자 노력하며, 운동과 의학적 치료를 통해 소멸의 순간을 늦추려 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완전한 멈춤이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흔들림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그 방법은 한때는 그림이자 조각이었으며, 언젠가는 사진이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상을 통한 포착이다. 그러나, 초당 60장의 사진의 나열인 영상은 역시 흔들림 자체를 잡아내지는 못한다. 기억의 순간을 박제하려는 노력 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존재는 흔들리며 죽음을 향한다.
영화 <애프터 양>은, 문화 테크노(로봇)인 ‘양’의 고장으로 시작된다. 존재의 소멸 앞에서, 흔들림을 박제하려는 인물들의 지난한 노력이 이어진다. 그러나, 찻잎처럼 무질서하게 부유하는 양의 기억들 속에서 그들은 깨닫는다. 정물이라 여겼던, 로봇인 ‘양’ 역시 흔들리는 존재였음을. 그 역시 자연의 법칙 아래 놓인, 우리와 같은 불완전하고 가벼운 존재였음을 말이다. 양의 부패는 필연적이며, 그건 그들과 자연,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네 가족의 춤사위에서 시작하여, 딸의 노랫소리로 끝이 난다. 비정형의 흔들림 자체로 시작하는 영화는, 역시 흔들림으로 끝이 난다. 그 속에는 철골과 목재의 단단함도, 인간 종의 근본적 의미도, 굳센 믿음과 신념도 자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벼움과 필멸성은 그렇기에 아름답고 향기롭다. 찻잎에서 우러나온 진한 색감의 차 안에는 세상이 담겨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대숲의 녹음, 초목의 광채와 청아한 새소리가 어우러져 있다. 그들은 끝없이 흔들리며 결국 사라질 운명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의 주변에는 인간과 로봇이 있다. 인간은 차와 사랑에 빠졌고, 로봇은 차와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한다. 차를 보는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는 존재가 있고, 자연이 있으며 세상이 자리한다. 그들을 보는 우리의 마음 역시 흔들린다. 어쩌면, 이 영화는 존재가 존재에게 건네는 위로와 격려일지도 모르겠다. 흔들려도 괜찮다고. 흔들리기에 아름답다고. 우리 같이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사라져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