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5년 브런치를 통해 공개한 적이 있으나 발행 취소 후 2024년 다시 쓰기 시작한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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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한 번쯤 엄마 아빠는 서로 사랑하고
나를 가진 것에 대해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며
우리는 영원히 가족일 것이라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아니 이미 부서졌지만 서로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 적이 있냐는 말이다.
1.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늘 내 머릿속에서 풍겨나오는 한 장면이 있다.
아빠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고 엄마는 거실 소파에 완전히 퍼져서 쓰러져 있다. 창문으로는 나른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지만 바깥의 풍경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작았던 나는, 아마도 유치원생쯤일까? 텔레비젼을 유심히 보고 있다.
“갓 태어난 새끼 오리는 눈을 뜬 순간 처음 본 고양이를 자신의 어미라고 착각하여….”
나는 빨려들어갈 것처럼 화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거기서
멈춘다.
2.
3년전 태호는 11살 터울의 여동생을 갖게 되었다. 우리 모두 축하해주었지만 정작 태호는 갑자기 집에 갓난 아기가 생겨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었다며 얼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밤새 울어대고 아무때나 싸서 아무때나 풍기는 똥냄새에 그 기저귀 갈아주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자기한테까지 밀려오고 온 가족이 그 아이에게 매달려 예전의 평화는 꿈꿀 수도 없다 했다. 여동생의 평화를 위해 자기의 평화가 짓밟혔다며 자긴 나중에 커서 아이없이 살겠다는 말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내심 궁금했다. 난 외동아들이어서 여동생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동생을 같이 봐주겠다는 말을 슬쩍 꺼냈더니 태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날 바로 나를 데리고 집에 갔다. 문을 여는 순간 버스에서 내뿜는 배기가스만큼이나 짙은 안색을 한 태호 어머니가 웃으면서 반겨주셨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너희가 와있는 동안 빨리 장을 보고 오셔야겠다며 외출하셨다.
“와 완전 귀엽다. 진짜 작네. 손도 못대겠어.”
“가끔 귀여울 때가 있긴 해. 근데 너도 몇번 오다보면 금방 질릴껄?”
나는 그 후로 몇 번을 더 태호네에 놀러갔지만 매 번 아기에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태호는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다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 아기는 어디까지나 태호 동생이니까 태호는 무섭지 않은 거다.
그런데 나에게도 오늘 그렇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새로운 가족이 생겨버렸다. 새로운 가족은 내가 겁쟁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태호의 여동생처럼 그렇게 연약한 존재로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두려움은 없었다.
3.
집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침묵은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우리 가족의 집이었지만 오히려 우리가 겉돌았고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는 햇살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내게 눈인사를 건냈다. 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처럼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지만 그는 그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이 내가 마음껏 쳐다보게 내버려두었다. 그의 시선은 불안정하지도 않았지만 고정되어 있지도 않아서 바람이 불듯이 자연스럽게 우리 집안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갔고 가끔씩 우리 아빠에게 멈추었다.
아빠는 들떠보였다. 뭐라 말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소까지 삼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는데 그 표정은 아빠가 치과에서 하루에 300번은 넘게 짓는, 특히 여자환자들에게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 직업의식 차원의 표정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저 미소를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그런것 같기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할 정도로 어딘가 낯선 부분이 있었다.
그런 아빠를 엄마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든 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마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우리 엄마 머리속은 문장들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모든 문장이 완벽히 논리적으로 설계되기 전에는 함부로 말을 시작하지 않는다.
아빠가 이 상황을 모를 리는 없었다. 아빠는 엄마에 대해서라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알기 싫은 부분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아빠가 이 정도로 모른 척 하는 일은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 때 침묵을 깨뜨린 건 엄마였다. 엄마는 침묵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할 말은 절대 참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이야. 얘기 좀 해.”
“다 얘기했잖아. 현리 왔으니까 우선 식사하자. 현리야 배고프지?”
아빠는 주저없이 나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자주 연대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아….진짜 배고프다. 엄마, 먹자.”
나는 엄마에게서부터 고개를 돌리며 말했지만 내 시선의 끝에는 혼자 그대로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이 희미하게 걸쳐졌다.
엄마, 미안.
엄마는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꺼내기보다 우선 식사를 하기로 했는지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엄마가 아빠에게 수긍했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논리적으로 설계도는 다 짜였기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여는 중이라도 엄마는 완벽히 설계대로 문장을 나열할 수 있었다. 다만 아빠가 지금 대화를 나누려하지 않는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지금은 엄마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선에서 멈추는 설계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껄끄러운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아빠는 어제 사온 고등어를 구웠다. 나는 언제나처럼 컵에 물을 따르고 식탁에 그것을 나르고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매우 의식해서 평소보다 하나씩 수저를 더 챙기는 것을 빈틈없이 해냈다.
그는... 억지로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시간을, 습관을 예의와 배려라는 명분으로 어설프게 난도질 하지 않았다. 그는 멀찌감치 소파에 앉아 우리들이 편한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래 가족이니까.....
나는 정말 본능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나의 부모님보다 내가 더 자연스럽게 덥썩 그를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우리와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4.
“니가 현리구나. 나는 너희 아빠의 좀 먼 친척이라 그동안 볼 일이 없었네. 이제 봤으니까 잘 지내자. 내가 32살이니까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해도 되고..”
“삼촌. 형은 아니고 삼촌이라고 불러.”
이미 일러두었지만 엄마는 해야할 말은 참지 않는다. 삼촌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여유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것을 보고도 같이 웃어주지 않았다.
“그래. 좀 먼 친척이라 아빠도 근래에 만나게 되었어. 삼촌이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서 지금까지 친구네에서 지냈더라구. 오늘부터는 우리집에서 지내기로 했으니까 현리도 잘 부탁한다.”
엄마는 아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주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는데, 이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우리 엄마의 일할 때 모습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밖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들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럼요. 저도 잘 부탁해요. 삼촌. 삼촌은 어느 나라 살다 오신 거예요?”
“영국에서 왔어.”
“영국 아직 못가봤는데…영국 얘기 해줘요.”
“응, 좋지.”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소파에 드러눕고 걸터앉았다. 아빠는 와인 코르크를 따고 와인잔을 세 잔 준비해 엄마, 삼촌과 함께 가볍게 한잔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엄마는 그런 아빠를 한 번 쏘아보더니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삼촌이 살짝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와인병을 살짝 돌려가며 아빠와 자신의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뭐 마실래?"
삼촌은 와인병을 살짝 들어올리며 마실 거냐는 식으로 장난을 쳤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으레 어른들이 와인 마실 때 그러듯 냉장고에 가서 내가 마실 탄산수를 꺼냈다.
"현리야 컵 그냥 이거 써."
아빠가 테이블에 남은 빈 와인잔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엄마....
그제서야 방 안에 혼잔 있을 엄마가 신경 쓰였다. 결국 나는 탄산수를 엄마의 와인잔에 따르고는 그대로 엄마의 방으로 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