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단체와의 협약식을 개최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힘들었다.
가장 힘든 일은 4대 종교단체가 누구의 우위도 없이 공평하게 모두 다 협약식의 주인공이 되도록 분배하는 일. 또한 시장님도.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했다.
협약식의 서명 위치도 문제였다.
5개의 서명 중에 윗줄과 아랫줄이 서로
기싸움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ㄱㄴㄷ순서로 결정하게 되었고 나는
똑같은 협약서를 20장 정도 출력하고 버리길
반복했다.
처음 공영장례의 취지를 설명하고
통화를 했던 날이 떠올랐다.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항상 협조적인 태도로 답변해주시는
사무국장님들이 정말 감사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요.
그게 소용 있는 일일까요?
라는 대답을 들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너무 고맙고 따스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행사는 식순과 자리배치, 시간 안배에 홍보까지
신경 쓸게 참 많았다.
자그마치 다섯 명의 대표자들의 일정을 조율하는 것도 어려웠고(결국 천주교와 원불교 두 분은 대리 참석을 하셨다)
심지어 국장님은 대상포진으로 입원 중에 잠깐 외출을 하셔서 참석해주셨다.
원래 협약식엔 각 종교단체의 대표들만 배석하도록 자리배치를 하고 소개를 하도록 시나리오를 짰는데 갑자기 수행하셨던 사무국장님들까지 한 원탁에 앉게 되셨다.
갑자기 시나리오가 뒤죽박죽 되었고 참석자 소개도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아 진땀이 났다.
서명을 한 후 옆자리로 협약서를 옮겨야 하는데 칸막이가 있어 나를 포함한 직원 셋이 같이 해도 손이 부족해 직접 국장님이 딜리버리(?) 서비스를 해주시기도 했다.
사실 형편없었다.
우왕좌왕했고 , 뭐하나 예상대로 된 것도 없었으나
딱히 망친 것도 아니었다.
모두 다 한마음으로 서명해 주셨고
공영장례의 취지 외 목적에 한마음으로
공감하는 자리가 되었다.
서로 의견도 나누었다.
외국인의 경우 연고가 없으면 비행기를 타고
운구를 해야 하는데 비용이 꽤 많이 든다고 하셨다.
고통을 서로 공감하고 나누는 모습에서
가슴이 짠해졌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며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
두해 전에 돌아가신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도 혼자 돌아가셨다.
죽음의 순간에 , 곁에 아무도 없었다.
사실 무연고 사망자는 고독사하기도 하지만
병원에서 돌아가시기도 한다. 즉 혼자 돌아가시는 건
아니지만 사망하게 되면 그 이후는 그 누구도
돌볼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마치 폐기물처럼 안치실 한편에 안치한 후에
연고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 시간은 꽤 오래 걸린다.
연고자를 찾는다 해도 시신을 인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법적으론 14일이지만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다.
연고자를 찾지 못하거나 시신 포기를 하게 되면 화장장으로 운구한다.
수원시는 보통 연화장에서 화장하게 되고, 그 경우 봉안도 가능한데 그 기간은 최장 5년이다.
처음 공영장례를 시작할 때 팀장님은
반드시 빈소 사용 10시간을 주장하셨다.
그것도 가장 중심인 오후 2시부터 밤 12시.
(보통 발인을 아침 일찍 하기 때문에 발인 후
다음 상가가 들어오기 전 오전 3~4시간이
가장 적당하다)
그래서인지 공영장례를 시행하는 자치단체는 많은데 빈소를 3시간 정도 사용하거나 또는 화장하기
직전 짧게 추모의식을 하는 것으로 진행한다.
물론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모두에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빈소를 10시간을 사용하겠다고 하자
관내의 장례식장의 반은 두 손을 들고 포기 의사를
밝혔다.
사실 그것도 이해가 된다.
손님도 없는 상가에 10시간이라니.
심지어 그 빈소는 창고나 빈 공실이 아닌
장례 이용객이 언제든 사용 가능한 실제 사용하는
빈소였기 때문이다.
빈소가 큰 곳은 커서 못하고
작은 곳은 빈소의 개수가 적어서 못한다 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고집했다.
유족이 없는데 빈소가 정말 필요하냐는 질문에
사실 대답할 수가 없었지만 그대로 밀어붙였다.
다행히 협조가 가능한 장례식장이 두 군데 있었다.
규모가 우선 적당했고, 운영자가 적극적이었다.
10시간의 장례 시간이 생기자,
국장님이 먼저 종교단체와 함께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전에 문화예술 과장님을 하셔서 종교단체에 대해
잘 알고 계셔서인지 단체와 컨텍이 순조롭게 되었고 단 한 번의 티타임으로 모두 협조 의사를 밝혔다.
그게 어제의 협약식으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제 정말 사업이 시작되는구나 싶다.
추경에서 예산 따내려고
예산과 가서 담당자랑 씨름하고 팀장님 앞에 굽실대고, 4개 구 사회복지과장님, 복지팀장님 직접 찾아가서 협조 요청하고 그 많던 일들이 훅 지나간다.
사실 그간 무연고 사망자 처리는 구청 사회복지과와 동 주민센터에서 행정처리를 했기 때문에
공영장례가 포함되게 됨으로 사회복지과에서 업무가 늘고 지출해야 하는 일이 더 늘어나게 된 거였다.
예산과 랑 싸워서 겨우겨우 얻어낸 예산은
3200만 원. 그나마도 무연고 사망자 처리에 세워져 있던 시비는 모두 삭감하고
도비보조금을 재배정해주는 아주 최상의 절감된 예산을 아끼는 방향으로 결정이 된 거였다.
숫자에 약한 나는 예산 담당자들이 정말 신기하고도 빡빡하기만 했다.
예산을 안 세워줘서 엎어질뻔한 사업이었다.
팀장님이 하다 말면 그동안 너 한일 하나도 없는 거라고 아주아주 다그치기 시작했고,
맨날 예산팀과 사회복지과, 노인복지과 등등 전화통 잡고 있어도 아무 소득 없던 일에 지쳐있던 나는 팀장님한테 그냥 하지 말자고 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 모두들 반대하는 거가 아닐까.
나 따위가 되게 만든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나는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다가 다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요셉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그전엔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심지어 강간미수범으로.
그전엔 노예였다.
나락의 시간에 요셉이 한 일은 무엇이었나.
그럼 그 시간 동안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았나?
절대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억울한 죄인, 노예, 감옥살이가 모두 포함되어있었다. 내 눈에는 실패 같아도 하나님 잎에서는 실패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엎어지든 살아나든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게 만약 정말 살아나야 하는 사업이라면
살아날 거라 믿었다.
어쨌든 협약식이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