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 아이의 눈물 속에서, 나의 엄마가 보였다.
부모님과 나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장녀이고, 한 살 어린 여동생, 그리고 열일곱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엄마는 나를 스무 살 무렵 낳았고, 내가 고3이던 해에 아들을 낳으셨다.
아버지는 애초부터 아들을 간절히 원하셨고, 막내가 태어났을 때 그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남쪽 고향을 떠나 서울로 시집오셨다.
혹독한 시집살이 속에서도 친정에 기대거나 하소연하는 일은 없었다.
외할머니는 자식이 많은 집안의 둘째 딸이었던 엄마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았고,
서울로 시집갔다는 이유만으로 잘됐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엄마는 혼자서 버텨내는 쪽을 택하셨다.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릴 적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사회에 나가셨다.
재산을 탕진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하셨고, 그래서인지 감정 표현에는 서툴렀고, 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셨다.
엄마는 스무 살 무렵, 나와 여동생을 연이어 낳으셨다.
나는 첫 손녀였고, 자연스레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나는 늘 할머니 곁에, 여동생은 엄마 곁에 머물렀다.
놀러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서로 다른 품이 익숙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 둘을 안고 20대 초반을 보낸 엄마에게
나는 어쩌면 ‘맡겨진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그 선택이 엄마에겐 숨 쉴 틈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어린 나에겐 엄마가 불편하고 어려운 존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기억이 하나 있다.
겨울이면 교실 한가운데에 난로가 있었고,
선생님께선 장갑을 끼고 그 난로를 켜셨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그 장갑을 빨아오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 주는 내 차례였다.
토요일 하굣길, 장갑을 받아 들고 집에 가던 길, 괜스레 불안했다.
‘엄마가 이걸 보고 화내시면 어쩌지?’
문 앞에 선 나는 한참을 울먹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조용히 장갑을 빨아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은 단지 장갑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엄마 앞에서 늘 조심스러운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부터 나는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여동생이 부러웠다.
게다가 예쁘장한 외모 덕분에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여동생은
늘 나보다 한 걸음 앞서 사랑받는 것처럼 보였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나는 결심했다.
부모님의 관심을 받으려면 공부밖에 없겠다고.
그렇게 공부에 매달렸고, 재수 없이 서울 중상위권 대학에 입학했다.
그 무렵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막내 동생이 태어나며 가족의 중심은 다시 ‘막내’로 향했다.
나는 점점 조용히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대학 졸업 후엔 취직을 핑계로 독립했다.
독립 후에 오히려 부모님과의 관계는 조금씩 편안해졌다.
주말마다 남동생에게 옷도 사주고, 용돈도 챙기며
평범한 딸, 언니, 누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여동생과 나는 겉으로는 가까워 보였지만
속으론 꽤 먼 사이였다.
나는 여동생을 질투했다.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인정받을 때,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기회를 얻는 것 같아서
속이 뒤틀렸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마 여동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연스레 나보다 편한 여동생과 더 자주 연락했고,
남동생도 나보다 여동생을 더 따랐다.
엄마는 가족의 중요한 일도 장녀인 나보다는
여동생과 먼저 상의하곤 했다.
나는 자주 ‘소외된 가족’처럼 느껴졌다.
서운함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줄 알았고,
참으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고스란히 내 안에 쌓여 갔다.
결혼 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다니던 회사에는 육아휴직이란 게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50대 초반이셨고,
첫 손주를 예뻐해 주셔서 아이를 맡기게 되었다.
아이는 평일에는 부모님 댁에서 부모님과 함께,
주말에는 우리 집에서 나와 지내는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리고 운동도 하시며
활발한 일상을 이어가시고 싶어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릴 때도 그랬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친구들과 티타임을 가지시거나 외출 중이셨다.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고,
조용히 집에 앉아 간식을 만들어주며 나를 기다리는
‘드라마 속 엄마’를 그리곤 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손주를 진심을 다해 돌봐주셨고,
그 안에 숨겨진 엄마의 피로와 고단함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미안해서,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상황을 무마하려 애썼다.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렀던 나는,
끝내 그 미안함조차 말로 전하지 못했다.
그 책임감은
결국 나와 엄마 사이, 오래된 감정의 매듭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금씩 벌어졌고,
아이를 맡겨놓은 내 마음은 늘 감사와 죄송함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동시에
왜 나는 엄마에게 여전히 이렇게 조심스러워야만 하는 걸까,
그 마음 끝에선 늘 쓸쓸함이 피어올랐다.
엄마도, 나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묵은 감정과 피로에 더 많이 물들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
어느 날,
터져버렸다.
우리가 서로에게 던졌던 말들—
그건 쉽게 씻기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