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돌아갈 수 없는 순간
첫 아이를 낳고 2년 뒤, 나는 둘째를 품에 안았다.
이번에는 꼭 산후조리원에 들어가 조리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첫 아이 때는 언론의 산후조리원 고발 방송을 본 아버지가
“차라리 친정에서 조리해라” 하셔서,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님 댁에서 조리를 했다.
신생아를 돌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밤잠을 설친 채 하루하루를 버티다, 겨우 3개월 후 회사로 복귀했다.
그래서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다짐했다.
이번엔 반드시 산후조리원에 들어가리라.
하지만 엄마는 말했다.
“네가 조리원에 있으면, 큰 애는 누가 보니?”
나는 당연히 엄마가 봐줄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의 대답은 달랐다.
결국 이번에도 친정에서 조리를 하게 되었고,
큰아이와 갓난아기를 함께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어
몸은 더 무겁고, 마음은 더 지쳐갔다.
그러던 중 엄마가 작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나에게 “아버지 식사 좀 챙겨드려라”라고 하셨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도 힘들고
마음도 가라앉아 있던 나에게
그 부탁은 유난히 서운하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잠시 와 있던 도우미 아줌마마저
“혹시 부모님 안 계세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시댁이 가까이 있었지만, 연로하신 시부모님께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집으로 내려온 것이 서운했는지
연락조차 하지 않으셨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생활하는 데 익숙해졌다.
큰아이에게는 어렸을 때 내가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어
분리불안이 있던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두 아이와 함께하는 날들이 몸은 힘들었지만,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버틸 수 있었다.
둘째 백일이 다가오자, 백일떡을 주문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었다.
엄마와 여동생이 오겠다고 해서
잡채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기 위해
새벽까지 요리책을 보며 준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집이 너무 멀어서 못 갈 것 같다”는 짧은 문자 하나가 왔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부러졌다.
시간이 흘러 회사 복직 시기가 다가왔고,
엄마는 막내 남동생 교육 문제로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셨다.
아침이면 두 아이를 엄마 댁에 맡기고
저녁 늦게 데리고 오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면서 엄마는 나에게 막내 남동생의 공부를 봐달라고 하셨다.
나는 주말에 봐주겠다고 했지만,
공부에 관심 없는 사춘기 아이를 가르치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숙제를 안 해오면 혼내는 것도 다반사였고,
그럴 때마다 남동생과의 관계는 점점 틀어졌다.
남동생 공부를 봐주는 게 오히려 서로에게 좋지 않다고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엄마는 내 말을 서운하게 받아들이셨다.
결정적인 날이 있었다.
숙제를 하나도 안 해온 남동생을 혼내자
사춘기였던 그는 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남동생을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나무라셨다.
그때 받은 상처는 오래 남았다.
또 한 번은 여동생과 사소한 말다툼이 생겼다.
그 이야기가 엄마 귀에 들어갔고,
주말에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온 엄마는
아이들 보는 앞에서 나를 밀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동생들 앞에서 장녀의 체면을 세워주기는커녕,
오히려 동생들 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우리 남매 사이의 거리는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멀어졌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막내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엄마는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훨씬 편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주 보지 않으니
부모님과의 사이가 더 나아진 듯 보였다
하지만, 엄마에겐 끝내 바뀌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