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 루이자 메이 올컷>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창가에 걸린 작은 전구들의 반짝임, 오븐에서 익어가는 계피와 버터 향, 그리고 몸서리처질 정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하지만 내게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한 가족이 둘러 앉아 나누던 검소한 식탁과도 같은 기억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가(家)의 네 자매가 둘러 앉은 따뜻한 난롯가에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추운 겨울날처럼 팍팍하다.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시대, 네 자매의 아버지는 전장에 나갔고, 가난은 소녀들에게 씁쓸한 현실을 더해준다. 메그는 오래된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조는 성탄절 아침에 선물 하나 없는 현실을 못마땅해한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서로를 다독이며, 가진 것보다 나누는 것이 더 크다는 걸 배우며.
어린 시절, 자유분방한 성격과 글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찬 조는 가장 빛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난 에이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림을 배웠지만 인상주의가 부상하는 시기에 그녀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이미 구시대적이었다. 재능에 대한 회의,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고, 결국 그녀는 사랑과 생존을 위한 선택을 고민하게 된다. 로리와의 관계 역시 로맨스라기 보다는 당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연극 배우를 꿈꾸는 메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고민하며 살아갔고, 음악가를 꿈꿨던 베스는 병으로 인해 집에 머물러야 했다. 조는 작가로서의 삶을 꿈꿨지만 출판업자가 원하는 결말과 자신의 이상 사이에서 타협해야만 했다. 유년시절에는 조의 자유로움과 강인한 독립심이 빛나 보였으나 이제는 다른 이들의 선택에도 동정하게 된다. 그들의 꿈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대로 변주되어 실현되었고, 그것이 어쩌면 현실적인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신적 성숙을 그린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인생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과 갈등, 성장과 독립 그리고 각자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그려진 <작은 아씨들>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이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 어린 시절 품었던 낭만적인 장면들보다 훨씬 현실적인 문제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처럼.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번번이 거절당하며 글을 쓰는 조, 천재 화가들의 작품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 에이미,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렸지만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무너지는 메그, 그리고 조용히 삶을 받아들이며 가족을 지켜보는 베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동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가 쓴 소설의 결말은 결혼이 아니었지만 일부 열성 독자들과 출판업자에 의해 조는 자신의 작품을 수정해야 했다. 어쩌면 너무 매끄럽고 완벽한 결말이었기에 그 안에 가려진 현실의 모순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만약 조가 경제적 지원 없이 강단있게 살아가야 했다면 여전히 꿈을 좇을 수 있었을까. 에이미가 파리에서 로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했을까. <작은 아씨들>의 해피엔딩은 무수한 의문문을 비껴간 결과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이는 조 마치의 원형이었던 루이자 메이 올컷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한다는 건 어린 시절 품었던 환상적인 동화를 그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둘 수 없음을 뜻한다. 어린 시절에는 낭만적인 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면 이제는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무게가 먼저 다가온다. 환상처럼 빛나던 동화가 깨어지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가 더욱 선명하고 깊이 남는다. 우리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실과 타협하고 때로는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작은 아씨들이 아닐까. 흔들리고 성장하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이기에. 언젠가 나도 조처럼 내 삶을 기록할 수 있을까. 나만의 작은 아씨들을 써 내려갈 날을 꿈꿔 본다.
Evoc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