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만의 이야기로 세상이 가득할 수 있다면
Before Sunrise
이렇게 설레는 영화가 있어?
역시 이끌림은 한순간
평소 로맨스 영화를 좋아해 온갖 로맨스 영화들은 모조리 챙겨보곤 했던 나는, 영화 '스타 이즈 본' 이후로 오랜만에 인상 깊은 영화를 발견했다. 나를 설레게 한 영화는 바로 '비포 선 라이즈'. 1995년작인 이 작품을 나는 왜 이제야 발견한 건지 의문이었다. 그 정도로 이 영화가 담아낸 두 주인공의 서사와 장면 하나하나가 나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두 주인공은 기차에서 우연히 처음 만나게 된다. 자꾸만 눈이 가던 사람에게 말을 걸기까진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할까? 말을 건네기까지 힐끗거리며 망설이는 눈동자, 말을 걸던 순간 떨림을 숨길 수 없어 방황하는 표정까지. '설렘'과 '호기심'이 가진 모든 감정들을 이 영화에서는 잘 드러내고 있다.
만약 내가 기차에서 눈길이 가는 어떤 낯선 남자를 보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생각하며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힐끗거리고 재기만 하다가 그대로 놓쳐버릴 내 모습이 안 봐도 훤하게 그려진다. 그런 나로 미루어본다면 본인의 직감만 믿고 용기 내어 말한 주인공들의 상황이 얼마나 두근거리고 설렐지 느껴졌다. 이 영화를 200% 즐기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이 느꼈을 듯한 그날의 공기를 그리며 봐야 한다. 그렇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동행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새 이 둘의 스토리에 풍덩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두 주인공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서로를 알아간다. 영화 소개 줄거리에서는 그 단 하루를 '사랑에 빠지기 충분한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낯선 서로에게 그저 내 이야기 하나를 툭 던졌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가까워진 듯한 느낌. 그 느낌은 나에게도 너무나 익숙해서 더욱 둘의 텐션이 와닿왔다. 일주일 내내 만나도, 밤을 새워도 뭐가 그렇게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은지 각자의 인생을 한 줌씩 풀어낼 때마다 늘어났던 웃음들을 회상하며 나는 더욱 그 둘의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대화의 힘
나의 가치관을 말하고, 그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일
비엔나의 굽이진 골목길, 사람이 붐비는 길거리 등 구석구석을 함께 걸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말하고, 들어주는 두 주인공을 보니 문득 지금의 남자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상대와 서로 '호감'이라는 감정을 깨닫기 전에는, 왜인지 모르게 그 사람이 자꾸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나 또한 새벽까지 말을 나눠도 계속해서 또 듣고 싶고, 헤어지기 아쉬워서 일부러 시간을 끌기도 했었다. 그만큼 그가 살아온 인생을 많이 궁금해했고 그 또한 내가 살아온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을 들으며 나의 가치관은 어떤지,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탐색했을 것이다. 그와 연애를 한지 벌써 5년이나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서로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다.
이렇게 수많은 말을 나누다 보면 무조건적인 공감만 표하지는 않게 된다. 서로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갖춰지게 된 '가치관'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가치관을 이해하려 하면 대화가 되지만 반박하려들면 대화의 길은 산으로 가고 만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단 몇 초라도 그의 이야기 속에 주인공이 되어보려 노력했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를 공감했고, '나라면'이라는 상상 속에 나의 가치관과 경험을 덧붙여 그에게 위로의 말이든 도움을 주는 말이든 건네고자 노력했다.
영화에서는 두 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오직 그들만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이해'와, 설령 나의 가치관과 다르더라도 그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나의 이야기와 감정을 진심으로 고민하고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어줄 편안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영화를 통해 한 수 배웠던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이 갖춰져 있던 그들의 대화방식이었다.
내가 느낀 이 영화의 정의
어색함은 기분 좋은 떨림으로, 설렘은 사랑으로
내가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몇 가지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진심이 담긴 눈동자'이다. 서로를 바라볼 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에게까지 진심이 느껴지는 그 진솔된 눈동자.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들은 모두 그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운 기류를 잘 담아내고 있다. '비포 선 라이즈' 역시 영화 초반에 나왔던 기차 씬에서 그들의 진심이 담긴 눈동자에 매료되어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영화가 되었다.
영화를 다 본 뒤, 이 장면만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른다. 이 매거진을 만들어 글을 쓰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레코드샵 씬은 나에게 '비포 선 라이즈'라는 영화를 이 한 장면으로 정의되도록 만들었다. 이 장면을 본 뒤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Yellow Wave'. 처음 만나 어색하고 신기하지만, 어느덧 경계는 관심이 되고 관심은 호기심으로 부풀어 이내 사랑이 되었다. 순식간에 강렬하게 타오르는 Red의 색도 아닌, 그렇다고 오해와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밀당을 반복하는 Blue의 색도 아니다. 오로지 천천히 흐르는 시간에 잔잔히 서로를 맡긴 Yellow의 색이 떠오르는 사랑이다.
레코드 음악 소리만이 가득한 좁은 공간에서 혹여나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 서툰 눈짓만으로 서로를 탐색하고 있던 두 주인공. 그 마음을 이어주듯, 흐르는 LP 선율 속에 어우러진 떨림이 화면 넘어까지 전해졌던 순간. 그 느낌을 나는 Yellow Wave로 정의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만약 이 영화의 여주인공 '셀린'이었다면 작은 쪽지에 아래의 글을 그 몰래 적어 헤어지기 마지막 순간 남자 주인공인 '제시'의 손에 "그냥 한번 적어봤어." 라며 수줍게 건넸을 것이다.
[Yellow Wave]
작은 레코드 가게 안
잔잔히 음악은 시작되고
이름 모를 설렘이 가득해
마음 들킬까 숨기듯 나를 보던
네 눈빛이 어깨에, 볼에, 얼굴에 닿았어
노래를 담고 쉼 없이 돌아가는 LP선율에
담겨오던 너의 이야기를 느꼈어
넌 모를 눈짓으로 널 슬쩍 보았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담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의 마음을 얹고 쉼 없이 돌아가는
선율에 내 마음도 슬쩍 올려놓았어
나도 너와의 지금이,
이 순간이 좋아
둘만의 세상을 밝힐
한없이 눈부신 우리의 순간을
함께 담아 보낼게
하룻밤의 꿈같은 잔잔한 기류의 로맨스 그리고 멋진 유럽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이에게, 혹은 자꾸만 말을 건네보고 싶은 이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면 이들을 보며 용기와 대담함, 이해와 노력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누군가를 향한 당신의 소중한 마음이 온전히 닿길 소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