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누워 숨쉬고 싶을 때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작은 과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완전히 남남이 되었지만, 한때 동고동락하던 동기들은 내 취향을 존중해줬다. 내 스타일을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대중가요부터 팝, 그리고 인디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불렀다.
대다수 멤버는 초심자와 실력자라는 스펙트럼 사이에서 왼쪽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애초에 밴드의 목적 자체도 뛰어난 실력자를 찾기보다 함께 커가는 변화를 지향했다. 전공 특성이 반영된 건가. 스스로에게 아쉬운 적도 많았다. 보컬'만'의 일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보컬이 노래 부르는 사람을 떠나 전체 그림을 잘 그릴 때 밴드가 도달할 수 있는 풍부함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내게 천재성은 없었고, 그저 평범한 수준에서 박자가 잘 맞는지 음 이탈은 없는지 정도를 체크했다.
남동생 같은 키보디스트가 있었다. 밴드 초심자가 우글거리는 와중에, 그의 음악적 소양은 깊은 축에 속했다. 이전에 밴드 경험이 있었다고 했었던 같은데 역시나 정확하지 않은 기억. 그는 든든했다. 곡을 정할 때 의견을 적극적으로 냈고, 부족한 부분을 잘 짚었다. 무엇보다 건반을 잘 쳤다.
활동기간 중 총 세 번의 공연을 했다. 친구들과 가족을 초청하고 티켓을 팔았다. 사실 거의 우리 돈으로 공연을 꾸린 거나 다름없지만 정기공연은 정기공연이었다. 나는 숱하게 다녀본 콘서트 경력을 바탕으로 매번 멋진 무대를 만들겠다며 뛰어다녔다. 그러다 어느 봄 공연. 처음으로 모든 멤버가 참여하지 않는 ‘스페셜 무대’를 기획했다. 어찌저찌 곡이 결정되었고 나의 목소리와 그의 건반으로만 무대를 채우게 되었다. 5분이 채 안 되는 랄라스윗의 ‘파란 달이 뜨는 날에’로.
우리의 무대가 특별했던 건 아니다. 곡이 원래 덤덤한 보컬의 목소리와 건반으로만 이루어졌으니까. 랄라스윗은 인디밴드를 한창 좋아하던 고등학생쯤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 ‘해피로봇 레코드’라는 레이블은 곧 누군가의 SM이자, JYP며, YG였다. 모든 소속 가수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역시나 다양한 개성으로-나의 관심 레이더망에는 늘 그들이 있었다. 랄라스윗은 어쩌면 내가 꿈꾸던 모습을 한 밴드였다. 평범한 목소리의 보컬과 그의 동반자, 건반이 만들어내는 담담하고 또 통통 튀는 곡들. 더욱이 두 멤버 모두 유명 대학 출신이다. 그렇기에 내 첫 데뷔곡이 랄라스윗의 ‘나의 낡은 오렌지 나무’인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오월’, ‘말하고 싶은 게 있어’, 그리고 ‘시간 열차’에 이르기까지 랄라스윗의 노래는 꽉 차서 답답한 마음에 숨구멍을 내준다. 꽉 차지 않은 소리가 주는 안정감이라는 아이러니. 거추장스러운 걸 다 빼낸 자리에 남는 사람의 목소리와 몇 가지 악기는, 순간 괜히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앉아있는 나를 떠올린다. 그래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지 못해 안달난 하루에 이들의 노래는 잊고 있던 숨소리를 다시 찾게 한다.
그런 랄라스윗 곡의 정점에 ‘파란 달이 뜨는 달에’가 있다고 생각한다. 힘주지만, 이내 힘을 빼버리는 이 노래는 핵심 단어인 파란 달이 가리키듯 간절히 바라고 꿈꾸는 것을 향해 달려가다 다시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누군가에게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읽히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해탈의 경지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무대를 준비하며 이 곡을 수 십 번, 어쩌면 수 백번을 불렀다. 당시에는 첫 연애를 끝내고 아마도 사랑이라 믿었던, 또는 사랑이었던, 그 감정과 녀석을 노래에 대입해서 불렀을 것이다.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 속 우두커니 서있는 내가 “기적 속에 사는 너를 안고 멈춰버린 시간에 서 있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담아 불렀다. 나의 건반 연주자도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지 않아도 그가 온 힘을 다해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재밌는 건 지금까지 유일하게 연락하는 동기가 한 명 있는데, 공연을 마치고 이 녀석이 내가 부른 버전의 노래를 녹음해서 듣고 있다고 말했다. 내 멋대로 정한 첫 팬의 탄생에 설렜지만, 어쩌면 그 노래가 그에게 울림을 준 건 그때 내 연애의 끝-그리고 건반-덕분이었을지도. 내 아픔이 네게 감동을 선사했다니 뿌듯하다 친구야 하하.
인생의 쓴 맛을 더 알게 된 지금, 오랜만에 노래를 다시 들었다. 놀라운 건 몇 년이 지나 다시 들어도 한창 이 노래를 듣던 그때 그 장면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나는 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고, “소리도 없이 찾아온 새벽” 속 가로등 불빛이 어스름하게 들어왔다. 나는 차갑고 시원한 벽에 붙어서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의외로 노래는 그때만큼 아프지 않다. 물론 지금도 나는 여전히 “파란 달이 뜨는 날”과 “초록 비가 내리는 날”을 기다린다. 말로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더 만족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노래는 생각에 지친 사람들이 들으면 좋을 것 같다. 이왕이면 방에 불을 다 끄고, 약간의 빛에 의지한 채 들으면 더 좋을 것이다. 한없이 슬퍼지는 노래가 아니라 더욱 좋다. 관현악단이 만드는 웅장한 소리도 없고, ‘나는 가수다’에서 우승할 만큼의 고음이 있는 노래도 아니다. 발라드라고 하기엔 보컬의 목소리가 절절하지도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일본 영화 같은 노래다. 지쳤지만 아주 일상적인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느낌.
생각의 전염성은 강하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의 전파력은 세다. 최근 읽고 있는 인지심리학 책에서도 이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는 생각을 잠깐 멈추고, 파란 달이나 초록 비를 머리에 그리도록 한다. 그 사이에 잠시 숨을 세어볼 수 있다.
검색을 조금 해보니 몇 년 전부터 랄라스윗은 활동을 쉬는 듯하다. 어딘가에서 파란 달과 초록 비를 여전히 찾고 있으시려나, 아니면 이미 찾아서 떠나셨으려나. 어디서든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어린 시절 두 사람에게 위로받은 소녀가 이렇게나 컸습니다. 여전히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있지만,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그저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당연한 듯 걸어갈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