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진달팽이, 말하는 대로 (2011)

20대의 끝자락에서 성공을 다시 정의하기

by 강주피

마음이 한창 힘들 때 개그맨 유재석 님과 관련된 글이나 영상을 찾아본 적이 있다. 얼핏 알고 있었던 그의 오랜 무명시절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면, 나도 그때의 시궁창에서 빠져 나올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퀴즈나 블로그 글,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는 연예인과 가십을 다루는 유튜브 클립 등을 쫓아다녔다. 대단히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었다.


갓 대학생쯤, 어린 나이에 그는 유명 개그 콘테스트에서 수상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친구들을 늘 재미있게 하고 웃기는 포지션이었던 그에게,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은 꽤나 자명했다. 잘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 그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재야에 묻혀있었다. 변변한 고정 프로그램 하나 없이 이 프로, 저 프로를 떠돌아다니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늘 해야 했다.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어 세상을 탓했다. 이런 아쉬운 마음은 그의 데뷔에 발판이 된, 그 콘테스트에서 수상 직후 귀를 파며 상을 받으러 객석에서 내려오는 모습으로 가장 잘 대변된다. ‘나는 이것보다 더 좋은 상을 받아야 하는데?’ 하는 자신감과 자만 사이에 위치한 어떤 마음. 그 마음이 그의 직업 개그맨으로서 여정의 출발에 자리했다.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하고 “두 눈을 감아도 통 잠은 안 오던” 그때,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세한 깨달음의 계기가 궁금하긴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의 나 또한 ‘어떤’ 계기는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의 그는 매일 신에게 기도를 하며 잠들었다고 한다.


단 한 번만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 만들어준 이 기회를 누구보다 아끼며,
제가 그렇지 않을 땐 저를 과감히 과거의 나로 돌려두셔도 좋습니다.

점점 그에게 크고 작은 기회들이 하나둘씩 주어졌다. 아마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대박 찬스는 아니었다. 솔직히 ‘눈 떠보니 밥상이 눈앞에 있었고 수저만 얹었다’라고 할 만큼 그의 소위 기도빨은 먹히지 않았다. 대신 지금은 또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 그거!”라고 할 만큼 유명해진 ‘책을 읽읍시다’라든가, 90년대 생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공포의 쿵쿵따’와 같은 프로그램이 찾아왔다. 경험적으로, 그때 시작부터 프로그램에 대단한 관심이 모아졌던 것은 아닌 듯하다. 예를 들어, 유명 드라마 작가들의 신작 소식이 떴을 때 수많은 기사가 뜨는 정도의 기대와 반응은 없었달까. 실제로 당시 그와 함께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는 그 프로그램으로 인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롤은 리액션 봇 정도였는데, 연출진이 애초에 그에게 진행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많이 웃어주라고 디렉팅 했다고 한다. 오랜 간절함 끝에 얻은 기회를 그는 놓치지 않기 위해 간절하게 웃었다. 그래도 여전히 카메라 울렁증은 남아 있었고, 완벽하지만은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그 완벽하지 않은 하루의 오랜 축적. 그 축적은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적어도 완벽에 가깝게 만들려는 작은 노력의 쌓임은 ‘성공'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의 이름이 그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성공이 판타지와 같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다고" 수십 번, 수천 번, 그리고 수만 번 외쳐온 끝에 얻은 결과라는 점에서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었다.


요즘 ‘성공’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과거의 내게 성공은 좀 더 빠르게, 단시간 내에, 그럴듯한 포지션을 얻고 그 포지션으로 불리는 사람이 되는 걸 뜻했다. 이를테면, 박사라든가 교수라든가. 물론 그 성공을 향한 올곧은 내달림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선호가 공허했던 건 아니다. 나는 인터뷰를 하고, 코딩을 하고, 그걸 글의 형태로 적어내는 일련의 창작과정에 아주 몰두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종종 진로 고민을 나눌 때 “네가 연구를 안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돼.”라고 공통적으로 말하는 친구들을 보며, 설령 '내가 싫어했더라도 이건 싫어하는 게 아니었구나.’라는 걸 깨닫는다. 성공의 정의를 다시 써내려 가다 보면 정말 많이 불안하다. 불안이 정상의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쉽게 와닿는다. 어린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성과를 지켜보며 부럽기도 하고, 적어도 1년 이상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료들이 부럽다. 적어도 일에 한해서는 말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대외활동 동료들을 만났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1년 만에 본 친구도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대학 시절 그때처럼 농담도, 놀림도, 조롱도 서로에게 치면서 놀았다. 술을 먹지 않아도 만취할 수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생목으로 노래를 불렀다. 음이탈이 나면 난대로 손뼉 치고, 호응하고, 목놓아 소리쳤다.


다음 날 아침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밤 버스 안에서의 기억은 생생하다. 참으로 감사했다. 이런 인연을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할 수 있다는 게. 재지 않고, 쫄지 않고, 엉망진창으로 노래를 부르든 말든 웃고 떠들고 치킨을 먹다 다시 호응해주는 이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수많은 얼굴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잠깐 스쳤던 인연부터, 어쩌면 내가 한때 원망했던 사람들까지. 눈앞에 닥친 불안정함에 나는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는 내 마음과, 그 마음을 또다시 함께 받들어주는 이들의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감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정말 들어야 하는 건 내 마음속 작은 이야기"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빠르게 나아가기보다는 내 하루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그게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성공'의 한 모습일지도.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얼마 전 어떤 유튜버의 자기혐오 극복기에 대해서 들었다. 그는 혼자만의 여행에서 자신만이 자기를 보호해야 하는 순간, 내면의 엄마가 있다는 걸 알아챘고 그 순간부터 자기혐오를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존감이라고 불릴 것을 얻기 시작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엄마는 지금의 당신에게 뭐라 말할까요?” 그녀의 질문은 심플했다. “예쁘다, 잘한다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혐오가 특히 자라나기 쉽다고 덧붙였다. 스스로가 소중하고 아까운 만큼 다그치는 거라고. “제가 너무 짠해요.”라고 상담 선생님에게 말하던 내가 떠올랐다. 나도 내가 너무 정말 많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이렇게 나한테 상처를 주곤 했구나.


성공을 20대의 끝자락에 다시 정의하며, 나는 나의 마음속 엄마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로 했다. 그 엄마도, 그리고 실제 나의 어머니도, 지금 나에게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빠르지 않아도 돼.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 충분해.” 어쩌면 생목으로 스물 다섯, 스물 하나를 부르던 그 친구들처럼.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은채, 이렇게 말하다 보면 언젠간 말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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