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게 사는 그날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 벌써 보름이 되어 간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어떻게 지나가나 싶은 하루도 수업에, 과제에,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밤이 되어 있다. 그 사이에 나는 균형을 찾는다고 꾸역꾸역 운동하는 시간을 넣기도, 친구와 수다 떠는 시간을 넣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가 '시간 낭비'라고 인식하지 않기 위한 마음 챙김의 시간도 조금 넣는다^. 다른 의미에서 나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건 맞다. 하루가 24시간인 게 아까울 정도. 조급한 마음이 때때로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조급함은 혼자만의 애타는 경쟁 때문이 아닌, 내가 얻어낸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나와의 싸움이라는 것.
^많은 박사과정생들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낭비라고 인식한다는 연구가 있는 걸 보고 매우 놀랐다!
나는 예전의 나를 많이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의 부족한 점을 찾아 나선다. 역시 그나마 아껴뒀던 영어 실력이 점점 바닥을 보이는 듯하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다.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있는 말이 충돌할 때, 나는 더듬고 당황하며 목소리가 커진다. 말을 끝내고 나면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쉬는 시간에 화장실로 향해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다시, 기운을 안으로 모으자.'
반성문을 쓰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머무는 이 학문 공동체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애정, 관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만큼의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는지 몰라도, 적어도 고등교육기관을 연구하는 이 고등교육기관은 학생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생각보다 더 바보라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 지도. 그래서 어쩌면 나는 더 많이 배우고 싶고 더 많이 성장하고 싶다고 (조급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아직 2주가 지나지 않은 나의 박사과정 생활에서 실력도, 관계도, 그 어떤 것도 너무 집착하지 않기를. 성장은 언젠가 어떻게든 일어날 테니까.
다른 캠퍼스에 살아서 거의 얼굴은 보기 힘든 (거의 랜선 친구인) 박사과정생 친구가 있다. 출국자 모임에서 알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메신저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크.. 다란 사람이 되자. 동그랗고 크게 살자."
인생의 쓴 맛을 나름 꽤 겪어봤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빅네임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꿈인지도 잘 안다. 오늘도 기숙사에서 학교 건물까지 걸어가면서 학부생인지 대학원생인지 모를 수많은 학생들을 지나치며 '나도 이 수많은 미래의 동문 중 한 사람에 불과하겠구나'를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해낸 성취는 분명 엄청 대단하지만, 또 그 대단함에 취하기엔, 구 씨가 말했듯, 한 사람 당 100원짜리 동전 하나라고 할 때 나는 저기 보이는 저 산의 작은 점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동그랗고 단단한 점이 되고 싶다. 크기는 결국 상대적인 거니까. 밖에서 보기엔 아주 작은 점이 안에서 보기엔 무한한 끝을 그리고 있고, 그리고 어쩌면 크기는 그냥 더 멋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이를테면 아보카도에 뿌리는 후추 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뭉글뭉글 해지기를, 다시 한번 기운을 가운데로 모으기를, 속이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고, 어디에서든 나의 기운을 땅으로 향하게 한 다음 편하게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침착하게 내 생각을 말하고, 언뜻 보기에 위기로 느껴지는 그것의 물살을 적당히 가르고,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동기(motivation)가 나를 설명하는 단어가 되기를 바란다.
신실하게 교회를 다니는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사실 여러 명한테 물어본 것 같은데, 답변을 제대로 들은 기억은 없다.) "어떻게 다른 누군가의 말이 네가 나아갈 길을 이끌어줘?" 오늘도 열심히 수업에서 배운 그 '비판적 사고'에 대한 몰두는 어떤 계명이, 문장이, 명제가 나의 삶에서 큰 울림을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고 살아오도록 했다. 그래도 인생에서 몇 번 몸과 마음이 바닥을 쳤을 때, 다른 사람의 말이 곱씹을 때의 맛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미 출국하기 전부터 모아둔 문장이지만, 몇 개 남겨보려고 한다. (전부 누구 말인지는 모른다. 알고 보니 내가 쓴 문장일 수도!)
Look not mourfully into the past. It comes not back again.
Wisely improve the present. It is thine. 현명하게 현재를 바꾸려고 해요. 그건 당신 것이니까.
Go forth to meet the shadowy future, without fear.
자신을 약자로 만들지 말라.
절대 후회하지 말라. 좋았다면 그것은 추억이고 나빴다면 그것은 경험이다.
열심히는 하지만 집착은 하지 말고!
매사에 감사하기. 모든 것에 감사하기.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약간 인간 불신 같네..) 단 하루 만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도교수님이 오늘 수업에서 이야기했다. "네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관심 없어. 네가 어떻게 길을 만들어나가는지가 궁금할 뿐." 나에게 주어진 건 기회일 뿐, 시험이 아니다. 누군가의 맘에 들기 위해 애쓰지도 말고, 내가 가진 주머니가 작다고 속상해하지 않기를. 배우는 즐거움을 느껴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