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방문을 열었다.
드디어 미국에 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내가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건진 몰라도) 신기하게 한 달이 되기 전까지는 한 몇 년 산 것 같더니, 한 달이 딱 넘고 나니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득하다. 이 한 달간 참 재미있었다. (과거형이 좀 섬뜩하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대도 하기 어려웠던 교수님들의 수업 준비, 너무나 재밌는 논문들, 어떠한 질문을 해도 두렵지 않은 수업 분위기 등등. 새로워서 놀랐지만 새로운 만큼 설렜다. 다행히 중심은 많이 흔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일에 굳건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때문인 건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 건지. 설레는 순간들을 지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퇴적암처럼 오랜 기간 쌓아온 내 연애가 분명 그랬다.) 예상치 못한 감정의 변화와 차이의 알아차림, 새로이 굴러들어 온 돌에게 빠지지 않으려는 박힌 돌. 이것들이 잔잔했던 마음의 물에 파동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예전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예민함이 불쑥 올라오고, 주변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피운 향초에 뒤집어진 U자로 생긴 유리병을 씌워둔 상상을 하면 이해가 더 빨라진다. 피어나는 연기가 유리병을 전부 뿌옇게 만들고 나면, 그 공기는 유리병 안에서 끊임없이 춤을 춘다. 연기들도 적응을 하는 거겠지.
너무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다시 정리하면, 미국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보니 공부도 익숙해지고 몇몇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차 깊어지면서 미묘한 감정들이 들 때가 있다는 거다. 리딩이 첫 주만큼 내 몸에 달라붙지 않고, 아름답던 캠퍼스를 바라보던 들뜸은 가라앉고, 부족한 영어실력을 대체하던 패기는 줄어들어서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되새김질하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약간의 눈치게임도 한다. 크지 않더라도 아주 작은, 아주 미세한 약간의 변화가 내 몸 안에서 꼭꼭꼭꼭 자라나기 시작하면 그 멜랑꼴리 한 기분에 괜히 내 중심이 흔들리지는 않을까 꽤나 염려한다. 그리고 어떻게 리셋해야 할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 안에 중심이 바로 서있다고 '믿던' 그때, 말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괜찮아. 없던 걸로 하면 돼." 사람과의 관계가 흐트러질 때, 중간 성적이 잘 안 나왔을 때, 진심인지 농담이지 알 수 없는 저 마법의 문장을 난 종종 던져왔다. "다른 친구 사귀면 되지 뭐." "2학기 때 잘 받으면 되지 뭐." 나는 과거의 '실수' 또는 '오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지울 수 없다면, 페이지를 넘기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은 척 주문을 걸곤 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새로운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다는 걸. 그 잘못 찍혔다고 생각해서 지우개로 지우려고, 화이트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던 그 점은 사실 그대로 있었다. 페이지를 넘긴다고 넘겨질 만큼 나의 시간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류학 수업에서 들었던 어느 부족의 시간 개념이 그러하듯, 과거-현재-미래는 분리될 수 없었다. 어느 짧은 클립에서 본 댄서 모니카의 말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시간을 방(room)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열어본 아버지라는 방에는 50대에 잡은 붓도, 20대에 차던 축구공도, 70대의 무언가도 다 널브러져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아버지는 어느 시간대의 누군가로 설명될 수 없다고 했다.
나의 시간이 그럴 것이다. 미국에서 지낸 이 한 달은 미래 나의 어떤 지점과 맞닿아 있을 것이며, 과거의 어떤 지점으로 나를 되돌려 놓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정리되지 않은 방에, 꼭꼭꼭꼭 자리한 약간의 미묘한 감정은 침대 밑에 밀어 넣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방문을 완전히 잠그고 새로운 방으로 갈 수 도 없다.
그래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방문을 열기로 했다. 방을 비울 수 없다면, 다시 한번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방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방이라는 걸 마음으로 챙기면서! 자리를 잘못 찾은 예민함은 다시 바구니에 잘 담아 옷장 안에 정리하고, 침대 위에 마구 흩어진 각종 생각과 읽기 자료들은 다시 한데 모아 책장에 꽂아둔다. 깔끔해진 침대 위에 다시 수많은 학자들의 말과 나의 생각을 일렬로 잘 펼쳐놓을 것이다. 다른 방의 시간대에 따라 맞춰둔 시계를 내 시간대에 맞추고, 대화할 사람을 초대할 생각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일기를 쓸 것이다. 방 정리만으로도 바쁘다.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45도 정도 돌렸다. 이제 문을 열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