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는 빛을 피한 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들었던 박쥐 이야기가 있다.
박쥐는 육지 동물 편에 들었다가 불리해지면 새들의 편에 붙고, 새들이 불리해지면 다시 짐승의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하고 혼자 어둠 속에 숨어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릴 땐 단순히 ‘이중적인 존재는 미움받는다’는 교훈으로 들었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을 보니 이 이야기가 꼭 우화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정치와 외교의 세계에서 박쥐의 처세는 비난받지만, 동시에 생존의 기술이기도 하다.
사림의 사화, ‘올곧음’의 비극
조선시대 사림들은 스스로를 도덕적 기준으로 세웠다. 명분과 의리를 앞세웠고,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올곧음’은 곧 ‘배척’의 이유가 되었다.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사화들은, 권력과 이상이 충돌할 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박쥐처럼 처신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박쥐보다도 잔혹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6·25 전쟁 이후,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당한 시대
전쟁은 나라를 두 쪽으로 갈랐다. 이념은 하나의 종교가 되었고,"네가 어느 편이냐?"는 질문은 곧 생사의 경계였다. 그때부터 한국 사회에는 ‘편을 정하지 않으면 불안한 문화’가 자리잡았다. 그건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중립’은 곧 ‘무책임’, ‘균형’은 곧 ‘애매모호함’으로 해석되었다.
지금의 외교, 박쥐인가, 현명한 균형인가
지금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 행보를 보면, 그가 택한 길은 ‘박쥐의 길’이라기보다 ‘광해군의 길’에 가깝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광해군의 중립외교처럼, 이재명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실리를 중심으로 한 균형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편가르기 DNA’를 버리지 못했다. 미국 편에 서면 친미라 하고, 중국과 대화하면 종중(從中)이라 욕한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말한다.
“이재명도 박쥐처럼 양쪽 눈치만 본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지금의 세계질서 속에서, 절대적 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익을 극대화하고 손해를 최소화하는 현실적 선택’만 있을 뿐이다.
박쥐의 교훈을 다시 읽다
박쥐 이야기는 어릴 땐 ‘기회주의의 경계’였지만, 이제 와서 보면 ‘생존을 위한 유연함’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그 유연함이 ‘책임 없는 회피’로 비칠 때 생긴다. 중립이 아니라 ‘눈치 보기’, 균형이 아니라 ‘방향 상실’이 되어버릴 때, 그건 진짜 박쥐의 길이 된다.
중립의 지혜와 기회주의의 차이
사림의 사화는 명분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보여줬고, 6·25는 편을 들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위태로웠던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두 시대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박쥐처럼 양쪽을 다 보려는 건 죄가 아니다. 문제는 그 눈이 어둠 속을 보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숨기 위한 것이냐에 달려 있다.
오늘도 어둠이 내리면, 박쥐는 하늘로 오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박쥐를 비난하기 전에, 그 어둠의 이유부터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솔직히 대한민국이 트럼프에 선물한 '신라의 금관'과 미국이 이재명에 선물한 '야구 배트'를 보면서 울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선물의 가치를 판단하기 전에 비교되어지는 현실에 더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산적의 두목처럼 이랬다 저랬다, 마치 세상을 쥐락펴락 하는 모습에 '불공정'을 외쳐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오늘 아침 미국의 반트럼프 언론과 친프럼프 언론의 '신란 금관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는 숏츠 영상을 보면서 한껏 웃으면서도 한 편으론 습씁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트럼프 황금 왕관, 미국 방송 반응 숏츠 영상이니 꼭 한 번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