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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들어 본 베트남 사람의 사과

사과는 상황을 바꾸진 않아도, 사람 마음은 바꾼다

by 한정호

베트남에서 산 지 16년째.

나는 아직도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아주 단순한 이유다. 그 말을 듣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일하고, 장사하고,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다 보면 정말 자주 마주치는 게 있다. 바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누가 봐도 명백한 실수인데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핑계를 대거나, 모른 척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기도 한다.

처음엔 어이없고, 나중엔 화가 나고, 그 다음엔 그냥 체념했다. "여긴 원래 이런 문화야"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속은 늘 부글부글 끓었다. 어디든 사는 건 결국 사람과의 마찰에서 비롯되는 감정 소모가 가장 크니까.


어제도 그런 상황이었다.

지인과 맥주 한잔 하려고 매장에 들어섰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이어트 중이라는 쬐금 남은 양심에 세트는 시키지 않고, 먹고 싶은 꼬치만 몇 개 고르고 생맥주를 마셨다. 지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앞에 있던 손님이 우리 테이블까지 계산했다며 웃으며 나가셨다.


감사한 마음에 나도 잔을 하나 더 들이켰다. 그런데 계산할 때 보니 전체 금액이 다 청구되어 있었다. "앞에 손님이 계산했다고 들었는데?!" 따져 물으니, 직원이 당황한 눈빛으로 다시 영수증을 들고 사라졌다. 잠시 후, 핸드폰을 들고 와서 번역된 한글 메시지를 보여준다.

“직원이 실수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그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화가 쏙 빠졌다. 사실 그 금액도 뭔가 과하게 청구된 걸 알았지만, 그냥 덮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과합니다”라는 말, 그 따뜻한 표현 하나가 나에게는 너무 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과한다고 상황이 바뀌냐고.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은 바뀐다.

사과는 상황보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베트남에서 산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잘못을 겪었고, 그 대부분은 사과 없이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가끔 듣는 그 짧은 표현이 어쩌면 오늘 하루를 따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사과는 상황을 바꾸진 않아도, 사람 마음은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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