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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호 May 30. 2024

유교국가 베트남, 여성이 쥐락펴락

여성의 파워, 강한 베트남을 이끌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동아시아권으로도 인정을 받는 나라이다. 동아시아 권역에 포함되는 조건으로 보통 유교, 대승불교, 한자 문화권 그리고 율령 이 4가지를 함께하는 것을 뽑는데 베트남이 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 베트남 불교는 6, 7세기경에 들어와서 뒤에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풍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

 2. 베트남에서 유교는 중국의 복속시대에 유입되었으며, 11세기 리 왕조 시기에 문묘를 건설하고, 과거시험을 개최하면서 번창하였으나, 18세기 응우엔 왕조 시기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하여 서양문화가 유입되고, 과거시험의 철폐 등의 영향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유교는 철학사상 아닌, 문학작품이나 유학자의 정치역할 등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하면서 발전하였다. 

 3.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시작한 19세기말까지 한자를 사용하였는데, 프랑스 식민정권은 중국을 견제하고,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로마자를 차용한 쯔 꾸옥 응오(Chu Quoc Ngu, 현재의 베트남어)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1918년 카이딘 황제 또한 한자 사용 폐지를 공표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자와 쯔 꾸옥 응오는 함께 사용되었다. 결정적으로 한자가 사라지게 된 배경은 1945년 호치민이 만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쯔 꾸옥 응오를 베트남의 공식문자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후 급속히 한자는 현실에서 배제되기 시작하였다. 즉 베트남에서 한자가 사라지게 된 것은 100년의 역사도 되지 않는다. 

                                           [ 베트남에서 한자를 안 쓰는 이유, 브런치스토리 by 미쓰하노이 발췌 ]

 4. 율령제(律令制)는 수나라 · 당나라에서 정립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의 국가들로 확산된 법계이다. 기원은 진ㆍ한의 율법이 기원이며, 당나라 때 율령격식의 형식이 정립되었다 베트남 최초의 본격적인 성문법은 대월 리 왕조 태종이 1042년에 반포한 《형서》(刑書)였다. 《형서》에서는 당률을 따라 태장도유사의 오형을 규정하고 있다. 율과 령이 모두 갖춰진 베트남 최초의 율령은 리 왕조 후기인 1157년, 영종이 반포하였는데, 여기에는 상속 등 백성의 생활에 대한 보다 상세한 규정이 있었다 [ 나무 위키 사전 재인용 ]  


 내가 말하려는 것은 베트남이 한국, 중국과 공통점이 많은 동아시아권 국가인데, 남성의 권한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점이다.

 일상의 거리에서 여자들은 아이들을 보든, 분주히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흔들 침대인 봄(Vong)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맥주나 커피를 마시면서 지인들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래서 '베트남에선 여자들이 얘들도 키우고, 집안 일도 다 하고, 심지어는 밖에 나가 돈까지 벌어와 남자들을 먹여 살리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옛날 조선시대에 유생이랍시고, 책 붙들고 앉아 있다가 식사받아먹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런데 현지인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그런 류의 사람은 집안에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으며, 결정사항에 있어서 아무런 권한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정말 그저 할 일없는 한량이기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베트남이 유교국가이고, 아직도 유교적 관습과 행동을 따르고 있다고 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놀라운, 그리고 내가 크게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발견하였다.  

 제자백가 시대의 유가는 한나라 때부터 농가, 도가, 음양가 등 다른 여러 사상을 조금씩 흡수했고, 중세의 성리학은 불교, 도교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했다. 이렇게 유교는 계속 보완돼 가며 19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동아시아 세계 모든 분야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이후에는 서구 문명의 진입과 자체적인 비판에 부딪치면서 국가 이념으로서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현재도 사회 규범이나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수기치인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자는 사상적 측면에서 동아시아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공자가 제시한 인이란,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사람다움, 즉,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또한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이란, 논어의 仁者 愛人('인'은 남을 아끼는 것이다)에 따르면,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 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는 것을 본 공자는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라는 외침을 한 것이었다.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된다.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여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장(長)이 된다. 공자는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였고,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또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불렀다. 즉,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자연스럽게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게 되는데, 이러한 인과 의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는 행위가 바로 예라는 것.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공자는 이러한 개념 아래, 당시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던 것이며, 예악을 따르는 인 군(仁君)을 일으켜 주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정치는 인을 갖추고 예에 밝은 군자(君子)[8]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 발전시켜 온 일련의 사상계(思想界)를 바로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19세기 서양의 침공과 근대의 충격으로 기존의 유교질서가 상당히 붕괴하였고, 20세기 초반에는 유교가 서양에 뒤쳐진 원인으로 지목되어 탈유교 또는 반유교적인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국가통치 주요 사상에서는 한 번 완전히 몰아냈던 것은 맞으나, 그럼에도 현재 멀쩡히 존재하는 종법적 질서, 연공 중시, 상급자에 대한 순종, 조상 숭배, 가부장제 같은 유교적인 관습과 정서는 동아시아 사회에 계속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교의 기초 사상을 살펴보던 놀라운 분석 기사를 발견하였다. '불교와 인생이야기'라는 다음 블로거의 '유교와 유교사상' 분석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불교를 배척하고 고려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교를 많이 배웠는데, 워낙 조선 시대가 유교로 유명하니 현대에서 한국적인 문화를 모두 유교가 기원인 것처럼 말하지만,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존댓말, 혼전순결 등은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유교 풍습이 거의 없던 고려 이전에도 한국 왕조에서는 어른에 대한 공경, 존댓말 등의 풍습이 중요시되었고 오히려 유교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던 송나라와 명나라에서는 존댓말이 존재하지 않았고 신하로서의 충을 강조했지만 어른을 공경하는 풍습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다. 워낙 조선시대 때 유교를 배우는 일이 많아 한국의 토착 풍습도 유교의 풍습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현대에는 많다 고 하였다.  

 

 이 글을 일고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국에서 유교의 기초사상을 이야기하면 '삼강오륜'을 이야기한다. 다음 사전에 따르면, 삼강오륜이란 유교 도덕의 기본 덕목인 삼강과 오륜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고,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장유유서(長幼有序),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이는 유교에서 기본이 되는 교육지침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본으로 돌아가 보면 양자 간의 구별과 존중이 주요 내용이지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조선시대에 왜곡된 모습으로 변질되어 양자 간의 차별을 인정하고 복종하게 만들어진 것임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옆 종묘 내부 모습

 베트남에서 유교사상이 생활에 접목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내가 유교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왜곡되어 현상을 오해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고 현실에서 반영되는 것이 유교적이지 않은가?'라고 의문을 가질 정도로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의문 때문에 지금에라도 남성과 여성의 구별과 존중이 필수이며, 여성의 파워가 강한 베트남의 모습이 유교적인 것과 아닌 것을 판단할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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