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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과 흥붕절: 오래된 기원의 의미

왜 유독 한국,베트남은 오래된 기원을 고집하고 국경일로 기념할까?

by 한정호

1. 두 나라의 국경일, 뿌리에서 시작하다

한국의 개천절(10월 3일)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기원전 2333년을 기념한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뜻 그대로, 민족의 시작을 천명하는 국경일이다. 단군 신화는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연도까지 구체적으로 못박혀 있어, 한국인에게는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기준점으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의 흥붕절(흉왕 기일, 음력 3월 10일)은 ‘반랑’을 세운 흉왕을 기리는 제향일이다. 푸토 흉왕 사원(Đền Hùng)에는 매년 제향 주간 동안 누적 ‘수백만 명’이 찾고, 단일 일자 기준으로는 ‘수만 명’ 수준의 인파가 몰린다. 이 행사는 UNESCO 인류무형유산으로도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행사다. 다만 한국과 달리 특정 연도를 확정하지는 않고, 제향일이라는 ‘의례의 시간’을 중심으로 기억한다.


즉, 한국은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도로, 베트남은 “음력 제향일”이라는 의례로 각각 시원을 제도화한 것이다.


2. 왜 그렇게 오래된 기원을 강조했을까?

보통 국가들은 독립이나 혁명, 공화국 수립 같은 근현대 사건을 국경일로 삼는다. 그런데 한국과 베트남은 예외적으로 고대 시원의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중국에 대항하는 자기 정체성 확보'라는 공통된 맥락이 깔려 있다.


한국은 오랜 기간 중화 중심 질서에 편입되었으면서도, 스스로를 ‘단일한 민족, 장구한 역사’로 강조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사학이 한국사를 왜곡, 축소했기 때문에, 민족사학은 ‘단군-고조선-기원전 2333년’이라는 서사를 앞세워 민족 정체성과 저항 의식을 다졌다. 해방 후에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면서 제도화되었다. 즉 개천절은 한국 민족사의 서사적 구조를 형성하는 핵심 내러티브다

베트남도 천 년 가까운 중국 지배 경험이 있었고, 이후에도 프랑스 식민 통치와 전쟁을 겪었다. 이 속에서 흉왕 제향은 '우리는 중국보다 앞선 고유한 뿌리를 가진 민족'이라는 상징으로 기능했다. 왕조 시기부터 흉왕 제향을 국조 제사로 격상했고, 현대 베트남은 이를 국가 공휴일로 편입하며 국제적으로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만들었다.


결국 두 나라 모두 중화 중심의 역사관에 맞서 자립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고대의 시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3. 현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오늘날 우리는 이 두 기념일을 단순히 신화적 기원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 정체성의 뿌리 : 신화와 전설은 실제 사실 여부와 별개로, 공동체가 공유하는 서사이자 정체성의 상징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결속이 강화된다.

나. 문화 자산화 : 베트남이 UNESCO 등재를 통해 국제적 브랜드로 만든 것처럼, 한국도 개천절을 세계에 소개할 수 있는 문화외교 자산으로 삼을 수 있다.

다. 비판적 성찰 : 다만 “더 오래되었다”는 숫자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화를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이해하면서 '전통의 발명'이 현대 국가 형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라. 국경일의 역할 : 국경일은 과거를 절대화하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개천절과 흥붕절 모두 우리에게 '우리는 오래된 역사를 가졌고, 그 위에 현재를 세우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날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개천절과 베트남의 흥붕절은 단순한 신화의 기념일이 아니라,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역사적 선택의 산물이다. 오늘의 우리는 그 의미를 존중하되, 고대의 숫자와 전설에 매달리기보다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국경일은 결국 과거를 숭배하는 날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우리의 정체성을 다지는 날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혐중 정서가 남아 있고, 경제적·군사적 대립은 날로 격화되고 있다. 미국은 관세 협상이나 주한미군 방위비 증액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면서도, 한국은 아직 완전한 전시작전권을 환수하지 못한 상태다. 일본은 다시 제국주의적 본성을 드러내며 ‘공격 가능한 나라’로의 전환을 사실상 마무리했다. 러시아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어가면서 한국을 향한 경계와 경고 조치를 늦추지 않고 있다. 결국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개입과 갈등은, 고구려나 조선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 개천절을 맞아, 이러한 현실을 되돌아보며 우리의 뿌리와 자주적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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