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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Man Jan 17. 2019

결혼이란 욕망의 전차

비혼 주의자, 결혼 불신 주의자. 이 불안하고도 불완전한 형태들은 그 반대편 넘어 있는 결혼이란 단어 아래 태어나 20대 중반밖에 지나지 않은 인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결혼의 가치는 순진하게 그 자체로 순종하며 존중하고 지향한다. 결혼의 가치 속 직관적 삶을 논한다면 수긍하겠지만 한국에서의 ‘결혼’이 불완전하다는 건 이전 세대의 영향 아래 파괴되지 않은 개인의 신념이다.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결혼’이라는 형태는 무엇일까? 늘 결혼이란 것이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되진 않았다. 하지만 특정한 ‘사회’ 혹은 ‘사회 속의 구조’에서 결혼은 그 자체로 불완전해진다. 그리고 나는 이 불안한 세상 속 불완전한 제도를 단순히 ‘거부’할 뿐이다. ‘거부’를 조리돌려 이야기하여 ‘포기’로 읽는 이들이 있다면 ‘글을 잘못 읽으셨군요’라고 대답을 드려야 할 것 같다. ‘포기’라 함은 제도권에 들어가고 싶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난 제도권을 수긍하지 않는 인간일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결혼은 개인의 욕망 또한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파괴시켜버렸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는 결혼에 대한 허망함의 민낯을 보여준다. 카메라로 보여주는 다른 이의 삶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온도 없이,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 개인이 아닌 하나의 테두리로 묶이며 결혼에 대한 현기증과 냉대로 비관적인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흡사 과거형의 아메리칸 뷰티기도 한 이 통찰적 비관주의의 영화는 결혼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파괴시켜버린다는 텍스트로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림을 스크린을 통해 제공해준다.


결혼이란 것을 여러 가지 메타포로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다. ‘파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과연 주인공들과는 다른, 파괴되지 않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까?라는 가장 단순한 명제를 물음표로 가슴에 남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 이라는 서적에서 끊임없이 증식하며 사방으로 퍼지는 분자와 같은 이미지로 ‘욕망’을 파악했고 우리의 신체의 모든 기관도 무의식적으로 움직인다고 하였다. 본래 인간은 욕망이 흐르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기관 없는 신체’의 상태로 가야 함을 이야기하는데 개인과 개인의 결혼으로 인해 잃어버린 각자의 고차원의 욕망은 그저 산화해 버린 어느 보이지 않은 ‘우리의 무엇’으로 연기처럼 사라질 뿐이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당신은, 부모님은, 주변인은 결혼 안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올해 들어 두 번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인간이 축복하는 자리에서 웃으며 손뼉을 치고 왔다. 물론 타자이기 때문에. 지인들은 시쳇말로 결혼은 언제 할 건지, 부정한다면 으레 그런 말을 하는 네가 먼저 갈 거 같다는 둥 가볍고도 온도 없는 이야기만 해댔다. 빠르게 자리를 뜨려고 하는 와중 먼저 결혼한 누나의 남편분께서 누나를 데리러 왔다. 결례를 무릅쓰고 차에 얹혀 돌아오는 길 너무 평범한 대화 속에서 그간 완고한 생각은 잠시 균열의 틈을 보였다.


“배고프지 않아?” “가는 길에 갈비탕이나 먹을까?” “내가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


그렇게 평범한 행복을 가까이 지켜보며 앞전의 고루한 혹은 치기 어린 생각의 근간은 조금씩 허물어지려고 했지만 그 생각의 뿌리는 자본주의를 가르쳐 아직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 뿌리는 평범한 행복을 사회라는 구조 안에 합의된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그것을 교묘히 에둘러 잘 포장한 불행으로 치환시켜 놓았다.


현대의 결혼은 자본주의 룰로 인한 현실의 로망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첫 문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 나타난다.”라고 이야기한다. 풀어 쓰자면 혼수로 이야기되는 상품은 결혼을 통달하는 생산양식이며 그것이 없이는 그 이데올로기를 감당해 낼 수 없는 ‘루저’로 이야기된다.


KBS가 17년도 5월에 진행한 ‘결혼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결혼 의향이 없는 남녀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혼자 사는 게 편해서”라는 답이 27%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많이 나온 대답이 “경제적 부담 때문에”였다. 남성의 경우 “혼자 사는 게 편해서”라는 응답보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가 더 높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 지인의 결혼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된다. 결혼 혼수는 부모님 손을 빌려서, 그렇지 않다면 비교적 작게 밑바닥부터 함께 시작한다는 이야기들을 성별 상관없이 듣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드물었다. 있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그냥 현세대의 누군가의 ‘썰’로만 소모될 뿐이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주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혼자선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전유물로 변모시켰다.

불완전한 사회구조 그리고 그 안의 제도 속 개인에겐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불완전한 것들을 합리화하며 제도 속 평범이란 이름을 성취하는 것? 여러모로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나 자신을 버릴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도 결혼이란 제도에 함께 손잡고 들어가자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삶의 순간 상대와 나인 우리가 물리적 공간에서 함께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낄때 같이 있을 것이다. 상대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고 상대도 나를 파괴하지 말았으면.


제도의 결혼으로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그 순결한 의미대로 함께 결속될 수 있는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껏 결혼이란 욕망의 전차는 제도 속에서만 돌고 있었다. 그 길을 벗어난 탈주야말로 전차는 제 역할을 할 것이고 바퀴는 앞을 향해 구를 것이다.


*독립서적 파사드 <파괴> 편에 기고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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