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는 고민하지 않던 것을 2021년 1월 1일에는 해 보았다. 올해 첫 콘텐츠로는 무엇을 볼까, 하는 고민이었다. 2020 한 해를 정리하면서 1년 간 읽었던 책 30권과 감상했던 영화 41편을 쭉 나열해 보았다. 그랬더니 '멋진 콘텐츠야말로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편리하고도 값진 선물 중 하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들여야 하고,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쏟아야 하고, 가끔씩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음을 빼앗겨 주기도 하는 것이 바로 콘텐츠가 아닌가. 때문에 나름의 의미를 담아 2021년의 첫 번째 콘텐츠를 고른다면 더 멋진 한 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전에 적어 두었던 To Do List를 몇 번이고 뒤적여 보았다.
고민 끝에 고른 콘텐츠는 2020년의 한 한국 독립영화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저장만 해 두었다가 시도 조차 못했던 영화였다. 무엇보다도 구어체 제목을 보는 순간, 사투리 섞인 말투가 입 안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게("찬실이는 복! 도 많지~!" ) 친근하니 꽤나 좋은 첫인상을 갖고 있던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 속 소박한 연출은 찬실이의 사투리와 사랑스러운 마음과 찰떡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모양새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는 연초 인사말에 덧붙이기 좋았다. "니는 니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깊이 생각해라'하는 찬실이의 다그침은 한 해를 계획해 보겠다며 스케쥴러의 빈 페이지를 조금씩 채워 넣는 나에게 기분 좋은 훈계 소리 같았다.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찬실이는 지금껏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계속 지낼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런 찬실이 또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면서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나는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좋아하던 영화를 뒤로 하고 딴 데 마음을 둘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는 내내, 찬실이는 주인집 할머니의 시와 자기 눈에만 보이는 장국영의 말에 울다가 웃는다. 진로 고민이란 건 수험생 시절, 대학교 졸업 예비반 시절, 취준생 시절에만 하는 고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찾아가기 위한 질문이 진로라는 이름으로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기에 어쩌면 평생에 걸친 고민 같기도 하다(지금까진 그러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찬실이는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을 향해 랜턴 빛을 밝히다가 보름달에 기도를 올린다.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찬실이의 기도 마지막 부분은 관객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왠지 그 기도의 마지막이 '해주세요'하는 단순한 요청이 아닐 것만 같다. 인생과 자아, 그리고 직업 등을 되돌아보던 찬실이라면 기도의 마지막을 '질문하게 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제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그런 찬실이에게 일찍이 응원의 대사를 남기고 간 장국영의 말을 다시 적어본다. 그 대사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치아키 선배의 마지막 대사를 닮아 거대한 (시간 혹은 우주) 흐름 속의 나, 그리고 그런 작은 존재인 나조차도 응원하고 지켜보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주어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준다. 찬실이의 말마따나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 같은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가 스스로 나에게 씌우는 제약들을 벗어두고서 최소한 1월 한 달 간은 찬실이가 내게 던져준 질문을 글감 삼아서 지면을 채워봐야겠다. 내가 가장 믿고, 하고, 보고 싶은 건 무엇일까. (정말, 찬실이는 복도 많다. 그런 찬실이를 1월 1일에 만난 나 또한 복이 차고 넘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