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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라디오를 다시 켰습니다

출근이 아홉 시더라도 제겐 새벽의 기운이 필요하거든요

by 프로이데 전주현

직장인 삶의 가장 큰 비애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않고 라디오 어플의 자동 시작 시간을 오후 열한 시에서 오전 일곱 시로 옮겨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빈약한 플레이리스트를 견뎌내야 한다는 것(지금껏 플레이리스트의 최애 곡들은 주로 라디오에서 '주워들은' 곡들이 많다)을 이야기한다. 정말이지, '새벽의 기운'이라 부르던 생활을 억누르고 오전마다 부지런을 떨었더니, 퇴근 후 에너지가 내게로 집중되지 않고 딴 데로 새는 기분이 든다 (아침 라디오만이 담아낼 수 있는 수다스러움과 파이팅이 있지만, 내겐 여전히 11시부터 2시까지의 밤, 심야 라디오가 더 제격인가 보다).


이번 달에는 직장 동료들에게 연달아 안녕을 고하느라 알게 모르게 감정 소모가 과했다. 급작스런 미얀마 쿠데타('미얀마 시민사회 역량강화'의 PM 역할을 6개월째 해오고 있다)와 새로운 업무(아아 사범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인턴십 프로그램)로 정신이 없었다. 글도 많이 쓰지 못했다(쓴다 하더라도 잘 안 써졌고).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의 터닝포인트를 경험했다(거창한 건 아니었지만). 지난 2주 간, 소소한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독일어 문제지를 풀며 전공과목 감각을 깨우는 데 집중한 게 시작이었다. 간만의 시험 준비라 초반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랬더니 웬걸, 그렇게 좋아하는 독일어가 재미없다. 마음을 고쳐 먹지 않으면, 시험이고 뭐고 이도 저도 안 되겠다 싶었다. 시험의 합격 여부에 목숨 걸지 말고, 즐겁게 시험을 준비하는 데 초점을 맞추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100점을 맞을 필요 없으니까(아무도 나보고 100점 맞으라고 안 그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너무 즐거워버린 걸까(?), 시험 준비가 한창 전공과목 감각이 살아있을 무렵의 에너지 리듬, '새벽의 기운'까지도 같이 깨워버렸다. 이 시간에 졸리지 않은 거 정말 오랜만이다. '새벽의 기운' 덕분에 다시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다. 이전처럼 좀 더 움직이고, 더 생각하고 싶어 졌다.


물리적으로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직장 생활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직장에서의 나는 나를 이루는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니, 거기에 크게 휘둘리지 말자고. 업무에 임할 때 디테일을 챙겨야겠지만, 그전에, 즐겁게 업무에 임하자(디테일은 그다음에 조금씩!). 업무 외 시간에는 오로지 나와 내 주변만을 챙기자.


그리고 오늘, 2월 말의 이런저런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가장 쉽게 해 볼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라디오 어플을 켰다. 김이나의 별밤과 옥상달빛의 푸른밤 중 무엇을 들을지 고민하다가, 책상 앞 붙어 있는 본디의 사진을 보고선 역시나 푸른밤을 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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