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제와 입헌군주제의 차이점을 표로 그려가며 암기했던 시절이 있었다. 만화와 드라마 <궁>의 인기가 상당했던 때였다. 고리타분하고 위압적인 특권의식을 나타내는 게 영 거슬렸지만, '그래도 지켜줘야 하지 않겠어?' 생각이 들게 하는 전통, 입헌군주제의 왕실/왕가에 관한 나의 정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최선, 최고의 제도는 아니지만 전통의 일부로서, 상징으로서 존중받을 만한 제도.
물론 최근 해리, 마클 부부의 폭로전으로 앞선 '생각의 나무(자그마한 글감이 틔워낸 싹이 성장한 바로 그 나무!)'가 조금은 뿌리째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공주님, 왕자님, 여왕님을 등장인물로 하는 이야기들에 익숙해진 터라 로열패밀리에 관심을 갖는 마음까지 부정하거나 내리 깎고 싶진 않았다. 로열(royal)하다지만 그들도 어디까지나 사람이고, 한 가족의 일원이며, 역사의 일부일 테니 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the Crown)>을 한두 편씩 챙겨 보다 보면, 지금까지 접해온 세계사와 영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들이 저절로 짜깁기 작업을 시작한다. 그중에는 (나를 향한 혹은 나로부터 누군가를 향한) 러브레터도 있고, 정치 음모극도 있으며, 유럽 통합의 역사와 포스트 식민주의 강의도 있다.
공주가 여왕이 되는 시즌1에서는 <킹스 스피치>의 말더듬이 왕이 한 가정의 아빠로 비치면서, 영국 왕실의 수장을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반인반수에 빗대어) '반은 왕관, 반은 인간(half-crown, half-human)'이라 부르던 대목이 눈길이 갔다. 왕관 아래에서 100% 사람일 수 없는 젊은 여인이라니. 왕관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세게 엘리자베스 2세를 짓누르지 않았을까.
시즌1이 일종의 성장 드라마였던 반면에 시즌2에서는 여왕을 여왕답게 해주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옴니버스형으로 선보여졌다. 특히 얼마 전 장례식을 치른 필립 공은 에피소드마다 가면을 남편, 남자, 아버지로 바꿔 쓰곤 했는데, 마지막 10화에서는 놀랍게도 신하의 가면을 쓰는 모습을 보여줘 시리즈에 긴장감을 더했다. 또한 마가렛 공주가 불 같은 성격을 죽이지 않으며 투덜대는 걸 보면 '실제로도 저렇게 매력적인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절로 일었다(무엇보다 마가렛 공주를 연기한 배우가 참 이뻐 보였다. 무언가 고전미가 있달까).
시즌3 재생 버튼을 누르기에 앞서, 두 시즌, 총 20화 동안 역사 공부 겸 엔터테인먼트 겸 나의 눈과 귀, 마음을 사로잡았던 더 크라운 시즌1-2 배우진들에게 고맙다고 적어두고 싶다. 시즌3부터는 훨씬 더 나이 든 왕실 일원들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배우진이 싹 다 바뀌었다고 하니, 무언가 시즌1-2를 '보내주는' 쪽글이라도 하나 써둬야 할 것만 같은 새벽이기도 하고...
+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아무래도 남의 나라 역사이다 보니 팩트 체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다. 다행히도 시리즈에 푹 빠진 사람들을 위한 역사서 겸 해설서가 나와있길래, 교보문고를 통해 1,2권을 주문해보았다(어느 콘텐츠에 관해 해설서를 찾아 읽던 게 <매트릭스> 시리즈 이후에 있었던가?). 시리즈에 이어 <더 크라운> 독서 또한 큰 즐거움이 되길 기대하며, 4월 말 5월 초의 도입부, 조금은 더 나이 든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