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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16. 2022

느린 호흡의 주문

월간 지음지기: 2022년 12월 "기다림"

식당 종업원이 고개를 조아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자리에 앉은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았었다. 죄송해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마저도 마스크에 가려져 종업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소비 지향주의, 서비스 중심 사회라지만, 일단 사과부터 하고 보는 접대 멘트는 음식을 먹기도 전에 속을 더부룩하게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추지 않아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담감을 떠 앉게 된다. 그쯤 되면 오히려 종업원이 나의 대답을 ‘기다리실까 봐’ 주문하려고 생각해 둔 메뉴를 한 번에 죽 읊어버린다. 종업원은 메뉴를 다급하게 받아 적고 빠른 확인 후에 테이블을 뜬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괜히 빨리 움직여야 할 것만 같다. 테이블에 오로지 나와 친구만 남자 그제야 숨을 고른다.


따지고 보면 빡빡한 일정 사이에 자리 잡은 식사 시간도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어 친구와 약속하고 방문한 곳이었고, 대기 시간이 조금 있다는 걸 알고서도 궁금한 마음에 찾은 식당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에요, 오래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하고서 종업원의 접대에 침착하게 대응해도 되지 않았을까? 나를 대접하는 시간 중 하나가 먹고 마시는 시간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만큼은 느긋해지면 안 되는 걸까?




<여행 독일어> 수업을 준비하던 어느 저녁이었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음식이나 음료를 주문하고 계산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독일어 표현들을 정리하던 도중, ‘메뉴 정하기’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독일(어쩌면 유럽 전반)의 식사 풍경을 ‘느린 호흡 ‘이라고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주문부터 계산까지 뭐든 빨리 해치우려는 우리나라의 식당과 다르게 독일의 식사 풍경은 여유롭다고 설명해주고 싶었다. 담백하지만 진솔한 멘트와 함께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해주던 독일 종업원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곱게 씹어 달아진 밥알을 목 뒤로 넘기는 것처럼 부드러운 느낌이다.


“여러분이 테이블에 앉았더라도 종업원이 굼뜨게 행동할 수 있어요. 왜 나를 신경 써주지 않는 거지 할 때쯤 메뉴판을 들고 나타날 수도 있죠. 그 종업원이 바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함께 식사를 하러 온 사람과 대화를 하며 느긋하게 식사 시간 자체를 즐기라는 존중의 의미일 경우가 많답니다. 혼자 식사를 하러 왔다면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겠네요. (…) 마실 것을 물어보고서 한참 있다가 메인 메뉴 주문을 받을 거예요. 한 번에 마실 것과 메인 메뉴를 다 골라서 주문을 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먼저 주문한 음료로 목을 축이면서 몸과 영혼을 살찌울 음식을 심사숙고해서 고르면 어떻겠어요? 식사 시간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좀 더 소중히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준비한 대로 수업을 시연한 이후, 느린 호흡의 식사가 비단 독일에서의 문화 체험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먹고 마시는 시간만큼은!’을 주문처럼 입 안에서 굴리고 굴렸다. 그런데도 좀처럼 주문을 써먹을 기회가 오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가족을 만나러 기차에 오르기 전 애플파이를 선물로 사가기 위해 한 빵집으로 들어갔다. 포장하려 했던 애플파이가 매대에 보이질 않았다. 곧장 카운터로 가 종업원에게 벌써 다 팔린 건지 물었다. 종업원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방금 한 손님이 오셔서 싹 쓸어 가셨어요. 지금 굽고 있는데 19분은 기다리셔야 나오실 것 같아서. 어떡하죠, 죄송합니다.”


그만큼 이 집 애플파이가 맛있으니까 손님이 찾아와 싹 쓸어간 것일 텐데 내게 죄송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새로 굽고 있다니 기다리기만 한다면 곧 따끈따끈한 애플파이를 사갈 수 있질 않은가! 오히려 운이 좋았다. 갓 구운 빵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애플파이는 ‘나오신다’고 표현할 정도로 귀한 분도 아니다. 황송해할 필요도, 죄송해할 필요도 없었다. 입 안에 갇혀 있던 주문이 새어 나왔다.


“그럼 기다렸다가 가져갈게요! 괜찮습니다. 6개 포장해 주세요. 그때까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하나 마시고 있겠습니다.”


서두르지 않았다는 생각에, 종업원의 미간 주름을 팽팽하게 펴주었다는 사실에 콧노래가 절로 났다. 빵집 한 편의 간이 테이블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그 자리에서 이따금 들이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고소하고 청량했다. 달큼한 냄새가 오븐에서 새어 나와 가게 전체에 가득 들어찼다. 정말이지, 황홀했다.


“주문하신 애플파이 6개 포장 나왔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종업원이 나를 불렀다. 무언가 이전보다 훨씬 더 밝은 목소리였다. 기다려주어 고마워하는 목소리였다. 안내받은 대로 19~2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였으나, 심적으로는 오래 걸린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 막 애플파이를 포장해서 빵집을 나왔을 뿐인데 든든했다. 느린 호흡의 주문이 제대로 들었나 보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ㄱ(기역)의 일환으로 쓰여졌습니다. "느린 호흡의 주문"을 읽고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이 그린 그림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보세요!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2958560574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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