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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27. 2022

등불 앞에

월간 지음지기: 2022년 12월 "기다림"

함박눈이 내린 뒤의 풍경을 기억하나요? 바닥에 깔린 것은 새하얀 함박웃음인데 그 위를 장식하는 하늘은 사뭇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함박웃음을 몇 번이고 짓이기고 못 본 체 한 잿빛 얼굴입니다. 그 얼굴의 볼 한쪽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왈칵 쏟아져 내리는 무언가에 흠뻑 젖어버릴 것 같습니다.


겁을 먹은 아이들은 벽 뒤, 커튼 뒤, 쥐구멍 역할을 하는 그 어떤 것의 뒤편으로 숨습니다. 다급해 보입니다. 그를 지켜본 어른은 허허 웃으며 머그컵에 따뜻한 초콜릿 음료를 내옵니다. 살아 있지 못하나 살아 있기도 한 전나무는 각종 오너먼트와 전구를 몸에 두르고 반짝반짝 재롱을 피웁니다. 


초콜릿 음료 한 모금과 전나무의 율동 한바탕이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숨어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창가 쪽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꽤 여럿 모이자 급기야 커튼을 열어젖히고 눈 내린 풍경을 보고 소리칩니다. 



밖에 나가 놀자, 우리!



머그컵을 정리하던 어른의 손길이 멈칫합니다. 아이들이 ‘우리‘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잠깐만,”하고 말하더니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모자와 장갑 목도리를 한 움큼 챙겨 나옵니다. 눈 내린 풍경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두꺼운 겨울 차림에 원래 몸집의 두 세배가 되어 버린 아이들은 뒤뚱거리며 걷는 서로의 모습에 까르르 웃습니다. 바깥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의 발아래에 함박웃음이 가득합니다. 


한 아이가 별다른 치장 없이 밖으로 향합니다. 찬 기운을 뚫고 주변을 뜨겁게 비추는 가로등으로 걷습니다. 장갑을 끼지 않아 손 끝이 발그레합니다. 새하얀 풍경 위에 뿌옇게 흩날리는 아이의 호흡은 그림을 수정하는 어느 화가의 붓질 같습니다. 어른은 화들짝 놀라 바깥으로 달려 나갑니다. 장갑을 짝짝이로 챙겨 나갈 정도로 서두릅니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의 모습에 다시 한번 까르르 웃더니 뒤따라 나갑니다. 



뽀드득-. 뽀드득-. 


가로등 바로 앞까지 간 한 아이는 뒤를 돌아봅니다. 신발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파여 있습니다. 그저 걸었을 뿐인데 길을 개척하다니, 위인이 된 기분입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가로등을 바라봅니다. 한 아이는 가로등이 뿜어내는 빛이 초콜릿 음료 한 모금과 전나무의 율동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른과 아이들이 한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고,”로 시작하는 말은 어른의 말입니다. 별다른 호명 없이 환호성을 지르는 말은 아이들의 말입니다. 한 아이의 신발 자국 주변이 어른과 아이들의 신발 자국으로 가득 메워집니다. 크기도, 모양도, 움푹 페인 정도도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모두 가로등으로 걷고 빛 앞에 모여듭니다. 부리나케 손에 장갑을 끼워준 어른에게 한 아이가 말합니다. 



놀자 우리!

 


새하얀 함박웃음이 사방에 가득합니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ㄱ(기역)의 일환으로 쓰였습니다. 최정연 작가의 "등불 앞에" 그림을 보고 쓴 글이지요. 글에 영감을 준 그림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 링크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2966043119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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