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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Jan 11. 2023

나의 자리

월간 지음지기: 2023년 1월 "그러나"

뿌우우우 푸쉬쉬쉬. 영화 속에서나 본 기차가 승강장에 들어서는 소리가 나더니 부엌에 고소한 밥 내가 가득하다. 메말랐던 쌀알이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는 시간. 쌀알 하나하나가 물기를 적당히 머금은 뒤 얼굴빛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는 쌀밥 한 덩어리로 불리며 이래저래 뭉쳐 지내야 하는 상황. 쌀알들은 밥솥 뚜껑을 연 사람의 허기를 자극하고 그의 동정심을 사기로 한다. 한 목소리로 외친다. ‘아침을 거른 게 벌써 며칠 째야. 이제 곧 시험기간인데 더 잘 챙겨 먹어야지. 여기 나를 좀 봐. 이렇게 손쉽게 퍼먹을 수 있는 나를 좀 보라고.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 벌써 잊은 거야?’


이솝은 밥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같은 것을 어느 이비인후과의 비염 치료제처럼 크게 들이마신다. 쌀밥 한가운데를 주걱 대신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쌀밥의 호흡에 곧게 폈던 손가락을 움츠린다. 주먹 쥐듯 주걱을 들고서 밥솥 안을 휘휘 젓는다. 밥솥 안 숨을 조금 죽이고서야 쌀밥 한 덩어리도 쌀알 하나하나도 아닌 밥, 그저 밥을 그제야 완성했다고 안도한다. 뚜껑을 잠시 덮어 두고선 벽면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본다. 오전 아홉 시. 평소보다 늦었지만 아직 아침식사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다. 이솝은 찬장에서 밥그릇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용기, 그나마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는 용기를 꺼내 든다.




서른이 다 되도록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이솝은 자신만의 방을 절실히 갖고 싶어 했다. 식사 시간이나 청소 주기, 분리수거 휴지통 배치까지 모든 게 자신이 통제하는 대로 작동하고 꾸며질 공간을 꿈꿔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붙은 유럽 교환학생 프로그램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학업 계획서와 잘 관리된 학점만 뒤따른다면 해외에서 짧게나마 자취 생활을 시작해 볼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아예 눌러살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질문이 잇따랐다.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하루하루를 계획하며 지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다. 공고문을 보자마자 유학 준비에 나섰고 보란 듯이 합격 통보를 받은 뒤에는 한동안 신이 나서 이 친구 저 친구를 붙잡고 자취 생활 버킷리스트를 공유했다.


부모님께 소식을 전한 건 버킷리스트 목록이 A4 세 쪽 분량으로 완성된 이후였다. 엄마가 이솝의 학업 계획을 반기며 비행기 표 끊어주려 할 동안,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이솝의 향후 일정을 묵묵히 듣고선 한 시간 빠른 뉴스를 보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다. 그런데 이솝이 유럽에 도착한 이후로, 영상 통화를 하자고 하거나 먼저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쪽은 아빠였다. 한국 생활 중에는 거들떠보지 않았을 법한 일상 풍경도 유럽에서는 달리 보인다고 찍어 보내면 아빠가 가장 먼저 답장을 보냈다. 그때마다 이솝은 이모티콘으로 화답하며 물었다. ‘저녁 먹었어 아빠? 뭐 먹었어?’ 하고서.






밥그릇에 밥을 덜어내고 공용 냉장고의 오른쪽 문을 열어젖힌다. 콩나물 같은 것이 한 봉지라도 있다면 금방 국 한 그릇을 끓여내 밥 위에 후루룩 부어낼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나마 국제학생들의 밀집 구역에 위치한 아시안 마켓에서 구한 갖은 재료들이 있으니 그것들을 가지고 조리대 쪽으로 간다. 한국 파보다 덜 매운 파와 한국 된장 보다 냄새가 연한 일본 된장(-그래서 기숙사 공용 주방에서 요리를 할 때 주변 학생들의 눈치를 덜 볼 수 있는 일본 된장-), 그리고 석회질도 탄산도 없는 생수 한 병. 재료를 다듬는 이솝의 표정 싱겁지도 짜지도 않다.


요리 중에는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르는데 오늘은 어학 수업에서 읽은 글을 떠올린다. ‘각 가정은 소우주와도 같아요. 그만큼 너와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문화가 다르다는 뜻이죠. 부엌을 지배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따져보기만 해도 각 가정의 문화가 정말 다르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답니다.’ 읽기 과제에 뒤이은 토론에서 이솝은 또래들의 대답과는 달리, 자신의 집에서는 엄마 대신 아빠가 부엌을 자주 차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부엌에서 아빠는 항상 무언가를 천천히 씻고 자르고 다듬고 끓여냈다. 싱겁기만 하던 재료들이 갖은양념 옷에 맛있어지는 아빠의 마법을 바라보는 것이 어린 시절 이솝의 취미였다. 아빠는 엄마(그러니까, 이솝의 할머니)가 부엌을 지키실 때마다 보조 역할을 자진해서 맡았다고 했다. 그때 이래저래 요리 팁도 전수받고 부엌일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가장 역할을 맡은 뒤로는 늘 ‘식구'를 챙기고 싶어 했다. 뚝배기 하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밥 먹어라" 하고 외치는 걸 즐거워하셨다.


아빠라면 멸치 육수라도 냈으려나. 이솝은 재료를 다듬다 말고선 핸드폰 화면을 톡 두드린다. 문자 메시지함의 읽지 않은 메시지 1건. 아빠다. ‘우리된장국 끓여서 계란말이 하나 하고, 집에 있는 김치로 집에서 해결하려 한다. 김장철이 지나서 여기저기서 김치를 보내주네.’ 이솝은 아빠의 문장이 ‘우리’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범주에 멀리 나와 있는 자신이 없다는 게 서글프다. 그러다가도 ‘된장국'이라는 말에 자신이 방금 조리대 앞에 손질해 놓은 재료를 흘깃한다. 아빠의 부엌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 같다는 생각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웃음이 난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한다. ‘밥은?’ 아빠다.


이솝은 가스레인지 전원에 손을 뻗고선 냄비 안에 생수를 붓는다. 불을 키운 뒤에야 핸드폰 화면을 마구 두드린다. ‘혼자 사는 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일이고 돈이네 아빠. 겨울이라 아무래도 뜨끈한 국이랑 밥, 반찬으로 이뤄진 한 상이 생각나는데 그렇게 해 먹기가 쉽지 않아.’ 아니지, 이렇게 적으면 어떡해. 이솝은 화면 속 문장을 머릿속에서 백스페이스 키로 먼저 지운 뒤, 몇 번이고 수정한다.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잖아 여기. 이솝은 이국의 부엌에 서 있는 건 아빠가 아닌 자신이란 점을 인지한다. 그곳이 마치 자신이 진입한 또 다른 소우주라고 여긴다.


일본 된장을 한 스푼 크게 떠 젓가락으로 솔솔 풀어내는 단계에서 이솝은 문자 내용을 고친다. ‘나도 지금 된장국 끓였는데, 통했다 우리! (이모티콘)’ 하고서. 아빠의 ‘우리‘에 자신의 ‘우리’로 대응하기로 한다. 육수용 멸치가 없어 아쉬워하는 것, 진한 한국 된장을 구하더라도 편히 쓰기 힘든 것, 콩나물국이 한국적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빠가 몰랐으면 한다.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1이 생기기 무섭게 사라진다. 아빠다. 


이솝은 답장을 읽고서 거칠게 끓기 시작하는 냄비를 응시한다. 갖은 재료가 냄비 안에서 싱크로나이즈라도 하는 듯 위로 솟구치고 있다. 된장 냄새를 빨아들이려고 틀어둔 후드의 전원을 끄고, 냄비 한가운데 손가락을 살짝 담가본다. 분명 뜨거운 것일 텐데 밍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손가락을 빼내어 호호 불어 물고선 아빠의 답장을 다시 한번 읽는다. 주방 바로 옆에 위치한 기숙사 방 문이 열리더니, 이게 무슨 냄새야? 하는 외국어가 들린다. 이제 겨우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이지만. 수저를 국그릇 옆에 내려놓자 굿그릇의 온기가 오른손등으로 옮겨온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ㄱ(기역)의 일환으로 쓰였습니다. 최정연 작가의 "나의 자리" 그림을 보고 쓴 글이지요. 글에 영감을 준 그림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 링크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2979651180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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