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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Jan 17. 2023

연고를 발랐던 자리

월간 지음지기: 2023년 1월 “그러나”

직장 생활의 꽃이라 불리는 ‘소듕한 점심시간’을 흡족하게 사용하고 사무실로 복귀하던 중, 윗입술 한쪽이 마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함께 있던 동료들은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마스크를 내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새로 산 구두를 신고 난 후 발 뒤꿈치나 엄지발가락 측면에서만 보던 물집이 윗입술 왼편에 봉긋 솟아 있었다. 그간 아무런 문제없던 입술에 물집이라니, 얼떨떨했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려 보니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덜컥 ‘이 입술은 이제 죽은 건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물집이 그렇듯, 함부로 터트려선 안 될 것 같았다. 신호등도 빨간불로 바뀌기 전에 노란불이라는 경고 사인을 주는데, 하물며 복잡 미묘하고도 신비로운 우리 몸에서 경고 사인을 안 줬을 리가 없다. 그렇게 단정하고 싶었다.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며 물집을 애써 무시하려던 마음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사내 메신저에 ‘잠시 약국 다녀오겠습니다’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회사 건물 1층에 위치한 약국을 찾았다. 문을 열자 체렝 하는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렸고, 하얀 가운을 입으신 약사 선생님께서 나오셨다.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입술을 보여드리자 선생님께선 다짜고짜 나를 혼내기 시작하셨다.


“아니 몸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했어요! 일이 많아요 요즘? 좀 쉬어가면서 해요. 안 그러니깐 몸에서 이렇게 신호를 보내네! 연고 줄 테니깐 하루에 세네 번 이상 수시로 바르고, 바를 때도 이 면봉으로 살살 펴서, 알았죠? 면봉 있어요? 여기 면봉도 같이 넣어줄게요. 아휴, 내가 다 속상하네.”


엄마에게서나 들을 법한 말을 약국에서 들다. 분명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지만, 정신은 바짝 들었다. 오래도록 못 본 체한 것들 중에 다름 아닌 건강이 있었다. 입술 물집이 잡힌 그날 이후로, 낯선 이나 다름없는 약사 선생님께서 걱정 어린 진단을 해주신 이래로, 나는 건강 관리란 평생 과제에 들이밀던 핑곗거리를 하나둘씩 물리기 시작했다. ‘데드라인이 내일인데,’ ‘피곤하니 일단 잠부터 자자. 잠이 보약이래,’ ‘당장은 맛있는 것을 먹고 스트레스를 풀래,’ ‘아직 젊으니깐 괜찮아,’ 하던 핑계들은 설문조사 인적사항란에 20대가 아닌 30대를 체크하면서부터, 나인 투 식스 정규직에게 예상외의 업무량을 부과하는 직장에 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더 입지를 잃어갔다. 체력이 달려 정작 하고 싶은 걸 못하면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퇴근 후 시간과 주말, 휴일 중에 “뭣이 중헌데?” 하는 대사를 절로 읊었다.


나는 나의 몸 상태를 직시하기로 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아파트 문 앞에 붙은 전단지를 읽지도 않고 곧바로 종이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었을 거다. 그런데 어쩐지 그날 손에 쥔 전단지는 정독했다. 초록색 바탕에 동글동글한 글자가 가득했다. 가만 보니 집 앞에 새로 생긴 필라테스 학원의 홍보물이었다. 오픈 기념으로 1:1 수업과 그룹 수업을 특별 할인가로 제공한다는 문구와 함께, 처음 필라테스를 접하는 회원들을 위해 체험 수업을 저렴하게 제공한다는 정보도 담겨 있었다.


운동을 생활화하지 않던 사람에겐 체험 수업 등록마저 큰 산처럼 느껴졌다. 용기가 필요했다. 방송 화면에서 종종 봤던 운동인들의 필라테스 수업이 떠올라 덜컥 겁부터 났다. 탄탄한 몸매들 사이에서 말랑말랑한 나의 몸은 한껏 뭉개지고 움츠러들겠지. 하지만 약사 선생님의 연고만 믿고서 몸을 혹사시켜선 안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입술 포진이 생겼다 사라진 자리를 쓱 만져보았다.




인바디에 이어 엑스바디 결과표까지, 레깅스 차림의 필라테스 선생님께서는 나의 몸에 관한 진단서를 고3 시절 모의고사 성적표처럼 인쇄해 들고 오셨다. 어느 쪽이 비틀어져 있고, 어느 쪽이 튀어나와 있고, 내장 지방과 근육량이 어떻게 되어 있고, 기초 대사량과 수분량은 어떻고 …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그것도 적나라하게 마주했다. 해결책은 한 가지였다. 신용카드를 꺼내드는 것. 예전보다 움직임이 뜸해진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다. 그런 때일수록 건강한 몸을 그릇 삼고, 나의 생각과 계획을 그 그릇에 담아내고 싶었다. 가뿐히 내린 결정치고는 일상을 기분 좋게 뒤흔드는 소비를 택했다.




체험 수업이 있은 지 약 일 년이 지났다. 이제는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가방에 레깅스와 발가락 양말을 한 벌씩 챙겨 집을 나선다. 3개월마다 “할부해 주세요”라는 당부와 함께 필라테스 수업을 추가 결제하며, 몸 상태에 따라 매번 다른 수업 시퀀스를 짜 오시는 선생님의 기획력에 감탄하며 지낸다. 나의 몸을 점검하다 보니 나의 생활, 버릇, 심지어 걱정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질 수 있다니. 기쁘다.


매번 다른 필라테스 수업에도 늘 빠지지 않는 동작 하나가 있다. 워밍업으로 수업 초반에 하는 동작인데, 선생님은 그를 ‘롤업(roll-up)’이라고 부른다. 롤업은 다리를 쭉 뻗고 니은 자로 앉은 상태에서 몸이 일 자가 되도록 납작하게 누웠다가 다시 니은 자로 일어서는 동작이다. 마치 돌돌 말려 있는 이부자리를 주름 하나 없이 쫙 폈다가 다시 동그랗게 말아 올리는 것 같달까.


간단해 보이는 모양새에 비해 롤업 동작에는 많은 조건 사항이 뒤따라온다. 말랑말랑한 몸에겐 버거운 동작이다*. 그렇지만 롤업으로 몸을 달구다 보면, 나의 몸, 정확히는 몸속 에너지를 조절하는 연습을 하는 기분이 든다. 약국 선생님의 애정 어린 진단이 들리고, 사무실의 정적을 깨고자 파티션 위로 들어 올리는 기지개의 자유로움이 떠오른다.


요즘도 신경 쓰일 게 많은 날이면 윗입술이 얼얼해지곤 한다. 필라테스 수업을 받고서 하루가 지나도록 아랫배가 당기고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몸도 여전히 삐그덕 거린다. 하지만 무언가를 결심했고,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늦었다’는 진단은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전과는 다르게, 하는 반전을 꾀하며 연초에 품는 희망이라 불러도 좋다. 작심삼일처럼 한없이 연약한 믿음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마주했다는 변화이지 않을까. 그새 롤업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필라테스 초보자가 정리한 롤업 동작의 시퀀스는 다음과 같다. 하나, 발뒤꿈치는 다리를 뻗은 바깥쪽으로 늘리는 느낌을 유지하고, 둘, 발을 몸 쪽으로 잡아당긴다. 셋, 배는 머리 쪽(눕는 방향)으로 끌어올리는 느낌을 주면서 힘을 줘 납작하게 만들고, 넷, 두 팔을 앞으로 곧게 펴고서 페이스를 조절하며 천천히 움직인다. 무엇보다도, 다섯, 눕고 일어날 때 척추를 더 이상 척추 하나로 인지해서는 안된다. 1번 척추, 2번 척추, 이렇게 척추 뼈 하나하나를 인지한다는 느낌으로, 척추를 분절해 가며 동작에 임해야 한다. 그를 위해 나는 척추 내부에서 일종의 파도타기가 이뤄지고 있는 거라고 상상하며, 밀물과 썰물을 닮은 롤업 호흡을 연습하곤 한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ㄱ(기역)의 일환으로 쓰였습니다. "연고를 발랐던 자리"를 읽고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이 그린 그림은 다가오는 1월 26일에 네이버 블로그와 지음지기 인스타를 통해 공개됩니다.

최정연 작가 그림 <연고를 발랐던 자리> 보러 가기: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2994889722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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