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는 토끼
2030 평화통일 글쓰기로 피우지: “소통”
슈라이벤은 오른손 검지로 휴대폰 전원 버튼을 툭 건드렸다. 액정이 까맣게 변했다. 생기 없는 반달눈이 화면에 흐릿하게 비쳤다. 화면을 계속 들여다볼 자신은 없었지만 알림음을 듣자마자 메시지를 확인할 마음은 있었다. 그립톡을 위로 펼쳐 둔 채 휴대폰을 식탁 위에 뒤집어 놓은 건 그 때문이었다.
꺼이꺼이 울던 전기 포트는 딸깍 소리를 내더니 절전 모드 칸에 노란 등을 밝혔다. 슈라이벤은 평소 생명수라 칭송하던 커피를 떠올리며 드리퍼에 부룬디 커피 원두를 쏟아 넣었다. 벽면 스위치를 작동시키자 식탁 위 미니 샹들리에가 수업 시간에 졸다 걸린 학생처럼 눈을 몇 번이고 꿈뻑이기 시작했다.
‘밥 먹는 곳인데 화려해야지’ 하던 엄마의 참견을 적극 참조하여 구매한 조명이었지만 점등이 원활하지 못해 스위치를 켜고 난 뒤에도 잠깐 동안 식탁 위에 긴장감을 번쩍번쩍 조성하는 녀석이었다. 집에 놀러 온 친구 여럿이 조명 교체를 권했지만 슈라이벤은 미니 샹들리에가 까탈스럽게 구는 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늦게나마 빛이 식탁 위를 고르게 비추면 어설픈 자취생의 요리를 탈바꿈시켜줄 엄마의 비범 양념장이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양념장에 밥 한 공기면 더 이상 배고프지 않았다. 간절하지 않았다.
어두운 것도 밝은 것도 아닌 곳에서 슈라이벤은 커피 제조를 시작했다. 머그컵 위, 정확히는 컵 위의 드리퍼 위, 더 정확히는 드리퍼 위의 필터 위, 최종적으로는 필터 위의 부룬디 커피 원두 위로 전기 포트를 기울였다.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부룬디 커피 원두를, 그 아래의 필터를, 그 아래의 드리퍼를, 그 아래의 머그컵을 데웠다. 그러는 사이에 (오늘도 정확히) 31초가 지나고서야 샹들리에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주홍색 비법 양념장이 커피잔에 부어졌고 슈라이벤이 쓴 안경 렌즈 위에도 쏟아졌다. 그때였다. 딴단다-. 휴대폰이 알림음을 토해냈다.
토끼가 돌아왔군.
슈라이벤은 재빨리 그립톡을 집어 들고 오른손 검지로 휴대폰 전원 버튼을 톡 눌렀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라는 안내 문구 아래 보름달처럼 붉은 동그라미와 그가 줄곧 토끼라고 지칭하는 숫자 1이 떠 있었다. 슈라이벤은 숨을 두세 번 고른 후에 액정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내리며 보름달을 눌렀다. 그러자 토끼는 순식간에 보름달 뒤편으로 달아났다. 대신에 문장 부호 하나 없는 간결한 ‘-해요’ 체 문장 하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슈라이벤은 붉은 보름달 위를 유영하듯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길게 적어 보낸 문자에 대한 답변으로는 다소 간결했으나 오래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아름답진 않았지만 보내는 이의 표정과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메시지였다. 슈라이벤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상대방에게 토끼의 행방을 직접적으로 물어볼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실시간으로 말을 섞으면 스스로 토끼가 되어 껑충 뛰어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왕 전달할 마음이라면 다듬어서 전달하고 싶었다. 신중하고 싶었다. 슈라이벤은 쓰고 싶었다.
삼십일, 삼십, 이십구 …
슈라이벤은 샹들리에 조명이 제대로 다 켜질 때까지 쌓아 올라간 31의 숫자 탑을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검지와 엄지를 번갈아 가며 휴대폰 액정 위를 꼬집듯 두들겼다. 글자가 하나둘씩 생겨났고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숫자 탑의 층수가 낮아질수록 오른손 엄지와 왼손 검지는 자판 위를 더 빠르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제아무리 속도감 있게 써 내려간 문장이더라도 오타 하나 없이 순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솔직하기도, 순박하게 웃어 보이기도 어려웠다. 그때마다 슈라이벤은 문장 위에서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문장을 수정하고 마음을 고쳤다.
숫자 탑이 절반 정도 해체되었을 때, 슈라이벤은 커피잔 위로 고개를 숙이고 코 평수를 넓혀보았다. 따뜻한 기운은 없었지만 시큼하지만 상콤한 원두 향이 진하게 우러나와 있었다. 슈라이벤은 참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을 양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오른손으로 커피잔을 움켜쥐고선 한약 삼키듯 생명수를 마셨다. 그 와중에도 왼손으로는 계속해서 자판을 두들겼다. 여전히 있었다. 화면을 계속 들여다볼 자신은 없지만 알림음을 듣자마자 메시지를 확인할 마음이. 문장을 늘렸다가 줄이기를 반복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숫자 탑이 1로 해체되었고 한 마리의 토끼로 변했다. 슈라이벤은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고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31이 아닌 1이 되었는데 샹들리에가 여전히 주홍빛을 발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슈라이벤은 오른손바닥으로 휴대폰을 와락 움켜줬다. 엄마의 비범 양념으로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다.
사무실 밖에서의 활동에 좀 더 애정을 쏟으며 지내던 2022년 늦여름, 김중혁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국립통일교육원의 2030 평화통일 “글쓰기로 피우지” 프로그램(이하 피우지)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 김중혁 작가님의 재치 있는 입담과 호기심 가득한 문장을 선호하던 사람이기도 했고, 한반도 평화 통일을 고민하는 한국리더십학교의 매거진리더십코리아의 기자이기도 했던 터라, 작가님과 함께 문장을 고민하고 한 권의 문집을 펴내는 과정에 관심이 갔습니다.
계절이 두 번 바뀔 동안, 기쁘게도 피우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여섯 차례에 걸쳐 김중혁 작가님과 또래 2030 작가들과 함께 읽고, 놀이를 하고, 영화 감상평을 나누고, 질문을 공유하며 ‘소통’과 ‘통일’이라는 두 개의 주제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한 권의 문집으로 2022년 12월 혹은 2023년 1월 발간 예정인 피우지의 결과물이 향후 2030 통일 담론의 귀한 참고자료로 쓰이길 기대합니다.
위 글은 국립통일교육원의 피우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웹사이트를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