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아일랜드
기왕이면 가보지 않은 도시를 걸어보겠다며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렇게 더블린과 인사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라도 (어쩌면 혼자서 하는 여행이라서 더) 말동무가 절실했다. 이제 막 모든 학사 일정을 마치고 졸업 여부를 기다리는 일만 남은 상황, 호스텔에서 만날 룸메이트에게 사교성 있는 말을 걸 에너지는 남아 있질 않았다. 몸과 마음을 딴 곳에 두고 싶어 시작한 여행엔 최소한의 동력만이 함께였다.
이어폰을 꽂고 시내를 걷자고 스스로에게 제안했다.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할 수도 있었지만, 누군가와 대화하는 느낌을 살려주는 오디오가 당겼다. ‘대체로 일방적이지만 믿을 만한’ 대화 상대가 떠올랐다. 매일같이 기숙사 방을 가득 채워주던 라디오였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만 했던 유학 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고요함이었다. 특히 도서관처럼 방음이 완벽한 기숙사 방에서 지내는 건 숨이 막혔다. 아무리 공부하러 밟은 타지라지만 사람 사는 티를 감추고 싶진 않았다. 그럴 때마다 드라마나 영화 속 등장인물 뒤로 깔리는 배경 음악 같은 것이 나의 유학 생활 중에도 깔렸으면 했다. 이따금 등장인물의 대사처럼 말소리도 들렸으면 했고, PPL처럼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에 노출되고 싶었다. 그래서 시험공부나 논문 집필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에 틀었다. 라디오를.
당시 즐겨 듣던 라디오는 MBC FM4U 라디오 <푸른밤, 이동진입니다>였다. 한국에선 자정부터 새벽 두 시까지 진행되는 심야 라디오였는데, 유럽에서 이를 실시간으로 즐기려면 초저녁 시간대에 라디오 어플을 켜야만 했다. 선곡이 정말 좋았다 (플레이리스트를 그렇게 자주 업데이트한 적은 아직까지도 없다). 그러고 보니 더블린이 어디인가, 영화 <원스>만 떠올리더라도 음악의 도시, 버스킹의 도시 아니던가. 푸른밤과 더블린이라니, 왠지 합이 좋았다.
생방송 시간대가 아닐 땐 지난 방송을 다시 들으며 걷고, 생방송 시간대엔 라디오 어플을 켜기로 했다. 그렇게 푸른밤과 함께 더블린을 알아갔다. 워킹투어에 참여하고, 카페와 서점, 미술관을 찾아 나서면서도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골목길로 들어설 때였다. 푸른밤 생방송 시간이 되었고 어플이 자동 재생되었다. 잔 부딪히는 소리와 라이브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어디선가 꽃향기가 왈칵 났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도 바깥소리가 상쇄되지 않자 이어폰 한쪽을 빼고서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지.'
한낮의 햇살이 들어선 곳이 많은 시간대였는데 은근 어두컴컴했다. 붉은 벽돌 건물 위쪽 오렌지 빛 조명에 불이 들어와 있었고, 자그마한 네온사인도 켜져 있었다. 머리 위로 드리운 색색의 꽃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하늘 정원인가 싶었다. 고개를 들어 꽃을 올려다본 그때, 이어폰에서 동진님의 오프닝 멘트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푸른밤, 이동진입니다” 하고.
서울과 더블린의 시차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시차가 소용없다는 생각을 한 것도 같다. 꽃그늘 속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사진을 찍고 보니 그곳이 바로 템플바였다.
- 템플바(Temple Bar): 더블린 시내에 조성된 펍과 식당, 극장, 상점 등이 모여 있는 거리. 도시의 대표적인 문화와 유흥 지역이다.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 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