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게마르크-풀카펠레(Langemark-Poelkapelle), 벨기에
비극적인 역사적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유럽 학생들의 단골 수학여행지다. ‘분열과 통합’이란 키워드와 함께 유럽과 유럽연합을 공부하던 시절, 나 또한 다크 투어리즘을 골자로 한 수학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해 보았다. 유럽 사람도 아닌 한국인이 치열하고도 잔혹했던 유럽의 과거를 제쳐 두고서 현대 유럽 사회를 이해해 보려는 것만큼 건방진 태도는 없다고 생각했다. 연도별로 역사적 사실을 줄줄 꿰고 있지도 못하고, 통시적인 통찰력으로 역사를 깊게 해석할 능력도 부족했기에, 역사적 현장을 직접 방문해 보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이 잇따를 거라 믿었다.
수학여행지로 찾은 곳은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중 하나였던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Flanders)이었다. 20대 중후반 또래들과 함께 당시 군사 시설이었던 벙커 사이를 걸어 보기도 했고, 사건과 유품 하나하나를 질서 정연하게 보존하여 전시 중이던 박물관을 구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묘지를 방문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니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들의 무덤을 방문할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처럼 다크 투어리즘은 학생들을 죽음과 희생, 전투의 장소로 끌어내는데 능숙했다.
묘지는 연합군 묘지와 독일군 묘지,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예상했듯이, 두 묘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연합군 묘지는 영국식 정원을 모티브 삼아 설계되었고, 장미 덤불 장식을 활용한 덕에 방문객들에게 깔끔하게 잘 정돈된 공원 같은 인상을 주었다. 넓은 하늘 아래 빼곡히 정렬된 묘비를 보는 것은 물론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승자의 묘지는 왠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놀랍게도 연합군 묘지에는 이름 모를 독일군의 묘비 두 개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 또한 다른 연합군 군인들과 똑같은 묘비와 장미 향기, 맑은 하늘을 누리고 있었다. 생명 앞에서 국적을 따지지 않는 풍경은 위대했다.
뒤이어 찾은 곳은 독일군 묘지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동상 하나와 작은 돌 십자가들만 지면 위에 우뚝 서 있는 풍경은 자연스레 묵념과 사죄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푹 숙인 듯한 모습, 일정한 간격으로 지면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검은색 정사각형 묘비, 그리고 묘지 주변을 둘러싼 큰 나무들, 간간히 땅을 비추는 햇살. 어느 한 예배당의 구석진 자리 같았다. 오늘날까지 독일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잊지 않겠습니다, 사죄하겠습니다, 바로잡겠습니다,” 하는 메시지를 꼭 닮은 공간이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카메라 아카이브를 돌려 보았다. 정지 화면으로 카메라에 저장된 풍경들은 머릿속 기억보다 더 극적으로 보였다. 덜컥 사진 한 장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왜곡될까 두려운 마음이 생겼고, 한동안 바로 떠오르는 감각만 붙들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만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니깐 오늘 이 글을 위해 사진을 꺼내 보는 게 참 오랜만의 일이다. 당장 두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영국 의원들이 피처럼 붉은 양귀비 꽃을 1차 세계 대전 추모 기간마다 양복에 달고 출근하는 모습, 그리고 홀로코스트 추모일이나 관련 행사 때마다 공식 연설을 통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독일 총리.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관광이나 쉼, 배움으로 구성된 밝은 분위기의 여행 대신 재난이나 역사적 비극으로 얼룩진 곳을 직접 방문하여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