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독일
시트러스 류 과일과 계피(Zimt)는 12월 유럽의 향이다. 그땐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 유제품이나 디저트, 방향제나 향수에도 향긋한 계피향이 자주 섞여 들어간다. 한 독일 홍차 브랜드는 '겨울의 꿈(Winter Dream)'이라는 이름의 블랜딩 차를 선보이기도 하는데, 오렌지와 계피 향이 적절히 섞여 있는 멋진 차다. 겨울의 꿈을 마실 때마다 나는 기억 속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Weihnachtsmarkt) 향기를 떠올리곤 한다.
전공 교과 과목 교재를 통해 배웠던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의 향은 랩쿠흔(Lebkuchen)으로 대표되는 생강 향기와 글뤼바인(Glühwein: 우리나라에선 벵쇼(vin chaud)라는 불어식 표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따뜻한 와인)에 빠질 수 없는 정향과 레드 와인 향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마켓 현장에서 가장 많이 맡은 냄새는 슈톨렌(Stollen) 위에 가득 뿌려진 슈가 파우더의 단 향과 계피(Zimt)였다.
특히나 '별 모양을 한 계피 쿠키(Zimtsterne; [찜트슈테어네])'가 아주 진하고 맛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독일 내 최대 규모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뉘른베르크(Nürnberg)로 수학여행을 떠났을 때, 어학 수업에서 친해진 일본인 친구 에리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 간식으로 소개해 준 것도 바로 찜트슈테어네였다. 두 손가락으로 충분히 집고도 남을 크기, 한 주먹 쥐면 다섯, 여섯 개 정도 꽤 많이 집히는 크기다. 10년 전 물가로 자그마한 종이 고깔에 100그램을 2유로 50센트에 사 먹었으니, 지금은 한 4유로 정도 할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시절 수능 일본어 수강 이력이 있던 나로서는 에리와 일본어가 아닌 독일어로 대화하며 친구가 된 과정이 참 특별했다. 각자의 모국어도 아닌,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인 영어도 아닌, 제3의 언어 독일어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찜트슈테어네까지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게 그저 즐거웠다. 에리와 처음 나눈 인사말이 영어였다면 독일어 수업을 같이 듣는 와중에도, 수학여행의 고속버스 안에서도, 계속 영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섞었던 언어가 독일어였기에 뉘른베르크에서의 그날도, 지금까지도 독일어 친구로 남았다. 분명 독일어는 서로에게 불완전한 언어였다. 하지만 당시 우리 각자의 삶과 흥미가 짙게 드러나는 언어로는 독일어가 제일이었다. 그래서 에리와 나는 서로를 보여주고 알아가기에 가장 좋은 수단으로써 불완전하지만 애정하는 것을 소통의 수단으로 택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선택이었다.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중에도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는 걸 보면, 강렬한 첫 만남을 압도하는 오래 지속되는 향기 같은 것이 에리와 나 사이에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 향이 모쪼록 찜트슈테어네처럼 진하고 달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이제는 각자 인생의 짝꿍을 한 사람씩 옆에 끼고서, 30대가 되어 직장과 가정, 개인 공간 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일본에서 에리가 기억하는 독일어와 한국에서 내가 기억하는 독일어는 10년 전의 그때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3년 간의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3년, 일본으로 가는 하늘길이 다시 활짝 열렸다. 혹 에리와의 재회를 계획하게 된다면 '겨울의 꿈' 차를 한 상자 사고, 오랜 사진 몇 장을 인화해 갈까 보다.
-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언어학 수업에서 배웠던 것들 중 일부가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그중 링구아 프랑카라는 개념이 유독 잊히질 않는다. 사용하는 언어나 기타 환경의 차이로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화자들의 소통을 돕는 통용어, 공통어를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글로벌 시대인 오늘날, 대표적인 링구아 프랑카는 바로 영어!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