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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산 이야기가 학창시절을 살렸다

런던, 영국

by 프로이데 전주현

입시 준비로 가득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중에 허락되는 일탈은 독서였다. 책 내용이 내신, 논술과 상관없어도 괜찮았다. 책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만으로 엄마는 잔소리를 거두었고, 그 덕에 나 또한 숨통이 조금 트였다.


고등학생 시절, 초등학생 때부터 읽어온 해리포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죽음의 성물이 출간되었다. 한국어 번역서가 여러 권으로 나뉘어 출간되고 있었지만, 나는 두꺼운 원서 하나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모의고사와 수행평가 등으로 가득한 고등학생의 일정 한가운데에 해리포터가 비집고 들어가려면 아무래도 영어 공부라는 핑계를 하나 더 추가해야만 했다. 계획은 성공했다. 수업 시간 사이마다 주어지는 10분의 쉬는 시간 동안, 사랑하는 시리즈의 이야기에 울고 웃었다.


번역서를 읽던 친구들과 원서를 읽던 친구들 간의 독서 속도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후자가 조금 더 늦었고, 때문에 전자에게 스포를 당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인지 주로 나와 비슷한 이유로 원서를 들고 다니는 친구와 어울렸고 등장인물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을 따로 갖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마지막 편에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죽었다.


그러고 보니 중학생 시절에도 나를 사로잡은 이야기는 영국산이었고, 장르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주소, 베이커가 221B에 사는 사립 탑정의 이야기였다. 초등학생 시절, 잠깐이나마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경찰관을 꿈꾸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마음이 입시 위주의 일정에 꺾이고 치이다가 셜록홈즈 시리즈를 읽는 것으로 대체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소년탐정 김전일은 꺼리면서도 명탐정 코난은 챙겨보았으니, ‘명성에 비해 의외로 순한 맛’인 셜록홈즈 시리즈를 즐길 기본기는 탄탄했다.


엄마는 고전을 찾아 읽는 딸을 반가워했다. 1권을 다 읽었다고 하면 2권을 사주겠다며 신나 하셨다. 2권 옆에 3권, 그 옆에 4권 … 동일한 디자인의 책을 순서대로 서가에 꽂으며 묘한 즐거움에 사로잡혔다. 빈 도화지를 완성해 가는 기분이었고, 이런 게 수집하는 맛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다. 원하는 것들로 시간표를 구성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달콤했다. 질리지도 않았다. 물론 중고등학생 시절과는 다른 차원의 잔소리와 일정들이 주변을 맴돌았지만, 그간 쌓아온 이야기 친화력 덕분인지 타격감이 덜했다. 그럴 때마다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겠다고 절감했다. 나를 강하게 하는 것들 중에는 확실하게 이야기가 있었다.


2012년 겨울, 마인츠 기숙사에 짐만 덩그러니 놓고서 대뜸 런던으로 향했다. 책에서 읽던 런던을 그제야 걸어보았다. 여행 루트는 자연스레 완성되었다. 킹스크로스 역에서 9와 4분의 3 승강장을 찾아다녔고, 베이커 가 역에서 내려 셜록홈즈 뮤지엄숍에서 앞뒤로 챙이 있는 체크무늬 모자를 쓰고선 거울 앞을 서성였다.



'그때 그 책들을 만나 다행이야.'



과거의 어느 점들이 하나로 이어져 멋진 곡선을 이룬 것 같았다. 기뻤다.



- 베이커가 221B(Baker Street 221B): 셜록홈즈의 주소. 셜록홈즈 뮤지엄숍에도 해당 주소가 적힌 셜록홈즈의 명함이 곳곳에 놓여있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 명함이 뮤지엄숍에서 공짜로 가져올 수 있는 멋진 기념품 중 하나라는 걸(소곤소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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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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