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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Sep 21. 2020

23. 1주일에 한 번,
"EXODUS" 빨래 여행

드르륵드르륵 비켜나세요 케리어가 나갑니다 드르르르륵

16.12.17 토요일


놀랍게도 우리 기숙사 지하에는 세탁실이 없다. 자전거 주차장을 그렇게 넓게 구비해 놓았으면서 그 흔한 세탁실 하나 없다. 관리실에 물어봤더니 이유가 가관이다(Listen!).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 중에 벨기에 학생들이 많고, 그 학생들은 주로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가 빨래를 해결하고 오기 때문에 굳이 따로 세탁실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게 기숙사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그럼 나 같은 국제학생들은 외부 사설 세탁방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시간도 돈도 더 든다.


기숙사 내 세탁실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벨기에 학생들은 주중에 뤼벤에서 기숙사에서 지내며 등하교를 하다가 주말마다 집으로 일명 'EXODUS: 탈 뤼벤 작전'을 감행한다. 그들 중에는 부모님께 손을 빌려 대학생활을 하는 경우가 학생들이 많기에, 매주 주말 집을 찾아 부모님과 가정을 잊지 않고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 '벨기에식 효'라고 할까나. 벨기에식 효에는 학생들이 1주일간 묵혀둔 빨랫감을 잔뜩 담은 캐리어도 늘 함께 가곤 한다. 


케리어에 빨랫감을 넣어가는 게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다만 문제는 그 케리어를 역까지 운반하는 그들의 방식이 꽤나 위험하다는 거다. 많은 벨기에 학생들이 자전거 통학을 한다. 그리고 EXODUS를 감행하는 날에도 자전거 통학을 한다. 어떻게? 한 손은 자전거에, 다른 한 손은 케리어에 놓고서 움직인다. 자전거를 탄 채 케리어를 끌고(!!!) 역으로 달린다. 그 모양새가 얼마나 위태롭고 공격적인지, EXODUS가 주로 일어나는 목/금요일 오후의 나는 드르륵드르륵 벽돌 길 위를 지나가는 케리어 바퀴 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길 안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저러다 부딪쳐서 사고라도 나면. 무섭다 정말.


그들이 자전거x케리어 곡예 끝에 기차를 타고 집에 갈 동안 나는 나만의 '빨래 여행'을 시작한다. 물론 나는 케리어만을 끌고 가지 자전거 위에서 곡예를 부리진 않는다.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세탁방까지는 걸어서 왕복 30분이다. 이용 가격은 6킬로 이하 4.3유로(36분 소요), 건조는 0.5유로(5분 소요)인데, 건조기까지 돌릴지 말지는 그날그날의 빨랫감에 달렸다. 오늘은 왠지 뽀송뽀송한 빨랫감을 앉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건조기에 1유로를 투척하여 10분을 더 대기하기로 한다. 5분만으로는 뽀송뽀송해지지 않기에.


빨래가 끝날 때까지 나는 주로 세탁방에 구비된 의자에 앉아 과제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주로 내부가 텅 비어 있는 세탁방이어서 가급적이면 밝은 시간에 와서 앉아 있다가 뽀송뽀송해진 빨랫감들을 들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쌍둥이 할머니들과 함께 세탁방을 지켰다. 할머니들은 옷도 똑같이 차려입으시고 머리도 똑같이 곱게 빗으신 채로 한동안 세탁기 앞을 떠나지 못하셨다. 이게 잘 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있으신 것 같았다.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하자 빨랫감과 함께 고개를 빙빙 돌려 보이시기도 했다. 어느 영화에서 본 것만 같은 풍경이다.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세탁방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꽤나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는데, 워낙 코미디 영화들이나 로맨스 영화들에서 소재나 촬영 장소로 삼아서 그런지, 세탁방에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나는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 그리고, 유학생활 중 세탁방을 이용하면서 빨래 여행을 떠나 보니, 집안에 세탁기와 건조대를 하나씩 구비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감사 제목인지도 깨닫게 되었다(역시 경험해봐야 비로소 보이게 되는!!!). 그러니 구시렁구시렁 잔말 말고 오늘도 퇴근 후 세탁기를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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