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시간이다. 내 차례에 무얼 이야기할까 골라내느라 다른 이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누군가 제2외국어를 발판 삼아 언어학, 문학, 교육학을 전공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순식간에 나의 눈과 귀가 그 사람을 향한다. (늘 그렇진 않지만) 금세 마음도 열린다. 그때마다 동료가 생긴 기분이 든다. ‘너도 힘들지만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길을 걷는구나’ 하는 생각에 리엑션이 풍부해진다.
그 사람과 나를 ‘우리’라고 슬쩍 그룹을 묶는다. 우리가 걷는 길은 언어 지식 습득을 넘어서 그 안에 담긴 삶의 태도와 문화, 역사를 함께 배우는 길이다, 하고 선언문 같은 말도 내뱉는다. 어느 외국어 시험의 시간표처럼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트랙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지 않은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네 가지 활동을 보란 듯이 잘게 부수고 한 데 섞는다. 먹음직한 비빔밥 한 숟갈을 완성한다는 생각으로 언어를 입 안에서, 종이 위에서 마구 굴린다.
평소 씨스타라 부르는 지윤이도 그룹 ‘우리’의 일원이다. 지윤이와 처음 말을 섞은 건 아프리카 부룬디에서의 문화 선교를 준비하면 서였다. 만남의 계기가 문화 선교인 것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외국어 학습자에게서 자주 목격되는 국제적인 마음 씀씀이 (한반도 바깥도 챙겨 보려는 마음)가 지윤이에게서도 보여 기뻤다. '너 내 동료가 돼라!'
친구가 되었다. 유럽에 방문할 일이 생긴 김에 지윤이를 보러 파리행 기차를 예매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제 막 교환학생 학기를 시작할 무렵, 지윤이는 지인의 빈 방을 잠시 빌려 생활하고 있었다. 꼭 유럽 동화(아마도 독일 동화였던가)에 나오는 신발 고쳐주는 요정 같았다. 요정은 주인이 잠을 자거나 자리를 비운 사이, 집 안의 문제를 해결해 놓고 사라지는데, 주로 낡아 해진 신발을 고쳐주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친절한 동거인이었다.
그런데 “언니, 언니!” 하는 부름이 끊이질 않는 걸로 보아, 그때 내가 만난 요정은 수다쟁이임이 틀림없었다. 지나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유학생의 삶이란 매일이 모험이고 자유로 가득하다가도 거리를 지나가는 한국인만 보더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정도로 외롭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윤이가 부르는 소리엔 나도 그저 웃으며 답하는 게 제일이었다. 그때 그렇게 리엑션 해주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 칭찬해).
지윤이가 지내는 곳 주변에선 에펠탑이 보였다. 흔한 관광객들이 찍어올 법한 구도가 아닌, 파리지엥이 무심코 찍었을 법한(하긴, 파리지엥이라면 에펠탑 사진을 아예 안 찍을지도 모르겠다) 에펠탑 뷰가 완성되는 곳이었다. 기념품 엽서 위에 프린팅 된 에펠탑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생활감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렸다.
노트르담 성당 건너편에 있는 서점에 들러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생활감 있는 에펠탑 뷰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메트로 출입구가 보이자 어깨에 맨 에코백을 몸 앞쪽으로 자연스레 끌어당겼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보던 지윤이는 씩 웃더니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티켓 판매기 쪽으로 쌩 하니 달려갔다. 프랑스어로 가득한 화면을 빠르게 전환되는 게 보였다. 찌른내가 진동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순식간에 표를 구매해 내게 건네는 지윤이에게 말했다.
"메르씨 보꾸(merci beaucoup; 고마워 정말)!" "빠 그라브(pas grave; 별 것도 아닌데 뭐)."
- 빠 그라브(pas grave): 쓰네 빠 그라브(Ce n'est pas grave)의 줄임말 표현. "큰 일 아니야, 별 일 아니야, 대단한 일 아니야" 하는 뜻으로 손사례를 치는 느낌이 든다. "에이 괜찮아요" 정도랄까.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