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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partout), 언제든 꽃이 있습니다

루벵, 벨기에

by 프로이데 전주현

으슬으슬한 기운을 품고 있던 대기 중에 포근한 무언가가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곱게 빻은 햇살 입자를 한 스푼을 넣고 휘휘 저어 마시는 믹스 커피를 준비하는 기분이 들었다. 1년 석사 과정의 절반이 끝나고 1학기의 기말고사 일정도 끝났을 무렵, 처음으로 유럽의 봄을 맞이했다.


가장 먼저 계절의 변화를 반기는 건 슈퍼마켓 계산대 뒤쪽에 위치한 화훼 코너인 듯했다. 튤립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벨기에, 그중에서도 심리적으로 네덜란드와 가까운 플랑드르 지방에 위치한 루벵은 3월 초부터 (하마터면 양파로 착각할 뻔한) 히야신스 구근과 진한 원색의 꽃들을 화분에 담아 진열해 놓았다. 상점들은 업종에 상관없이 달걀 모양의 장식품을 간판과 가판대에 진열하며 부활절 연휴를 예고했는데, 달걀 옆에는 토끼와 병아리, 양 모양의 귀여운 오브제들이 가득했다. 베이비 샤워 풍경을 닮은 가판대를 보고 있으면 괜히 우유가 잔뜩 들어간 초콜릿이 떠올라 입맛을 다셨다.


봄기운은 통학길에도 가득했다. 워터뷰 기숙사에서 프랑스어 수업이 있는 지역 어학 센터로 가기 위해선 칼자루 모양의 도나투스 공원(Sint-Donatus Park)을 가로질러야만 했는데, 그때마다 왼편에 늘어선 가정집들과 공원을 구분 지어 주는 벽돌 담벼락 위로 길고양이들이 자주 보였다. 하루는 담벼락 위를 새삼 도도하게 걷다가 그 위에 풀썩 내려앉는 길고양이를 보았는데, 그 모습이 꼭 기말고사를 마치고서 기숙사 침대 위에서 널브러진 내 모습 같았다. 고양이의 숙면을 방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그 담벼락 옆에서 깔깔 웃었다.


공원 진입로 오른편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었다. 어쩌다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에 그 옆을 지나가면 형형색색의 책가방이 어디론가 파고 들어가고, 어딘가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걸 구경할 수 있었다. 쏴아 하고 내리꽂는 봄비를 닮은 풍경이었다. 소란스러움에 비해 의외로 부드러운 비, 굳이 우산을 꺼내 펼치지 않아도 되는 비, 맞아도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들게 하는 비. 학생들의 함성 소리에 학교 종소리까지 더해질 때면 온몸으로 봄비를 받아내고도 젖지 않은 기분이었다.


걷기 좋아졌다. 기지개를 더 자주 켜고 싶어 졌고,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어떤 색의 꽃봉오리가 개화 축제를 준비하는지 구경하는 일이 많아졌다. 형광팬을 잠깐 쓰더라도 괜히 노란색을 골라 들었다. 한 번쯤 수업을 빠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일기장에 적는 연도 정보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 Il y a des fleurs partout pour qui veut bien les voir (There are always flowers for those who want to see them) : 앙리 마티스는 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든, 언제든 꽃이 있습니다. 꽃을 보고파하는 당신이 있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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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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