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벵, 벨기에
루벵(Leuven, Louvain)에서 지내던 기숙사의 이름은 워터뷰(Waterview)였다. 자그마한 보트 선착장이 건물 앞에 있긴 했으니 이름만 워터뷰는 아니었다. 나는 3층에 살았던 터라 앞 건물에 워터뷰를 빼앗기며 지냈지만, 통학길이 콘크리트 바닥으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는 걸 위안 삼으며 선착장 앞을 걸어 다녔다. 선착장 주변에선 늘 떼가 낀 물 냄새와 보리차 냄새가 함께 났다. 스텔라 아르뚜아(Stella Artois)라는 맥주 공장이 근처에 있던 탓이었다.
워터뷰는 깔끔한 외관과 내부를 자랑했는데, 겉모습에 비해 편의시설은 다소 부실했다. 결정적으로 세탁실이 없었다. 관리인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워터뷰를 이용하는 학생들 중에는 국제 학생이 아닌 국내 학생, 그러니까 벨기에 학생들이 많은데, 그들에겐 세탁실이 굳이 필요 없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니 왜?)
한국 대학생들이 그러하듯, 금요일에 아무 수업을 잡지 않고 '주 4, 금요일 공강'의 시간표를 만드는 건 벨기에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그런 시간표를 짠 학생들은 목요일 수업이 땡 하자마자 하루라도 더 긴 주말을 즐기기 위해 집으로 대탈출(exodus)을 감행한다. 당시 벨기에 여자친구를 곁에 두고 있던 한국인 유학생은 부모님께 손을 빌리며 대학을 다니는 벨기에 학생들이 꽤 많고, 그들은 매주 집을 찾아가면서 일종의 '벨기에식 효'를 보여주는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목요일마다 강의실에 캐리어 하나를 끌며 통학하는 학생들이 특히 많았다.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기차 몇 분, 몇 시간에 집에 갈 수 있다니 부러울 따름이다. '목요일의 케리어'에는 일주일 치 빨랫감이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니 기숙사 입장에선 굳이 돈을 들여 세탁실을 만들 생각을 못하는 거였다. 건물 입장에선 이용객이 많지도 않고 수익도 크지 않은 거다. 학업 외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걸 동선 효율적으로 뚝딱 해내고 싶었던 내겐 비보였다. (국제 학생도 여기 기숙사에 있는데...)
벨기에 학생들이 자녀 된 도리를 다하며 집 안에서 세탁물을 공짜로, 가볍게 처리하며 주말을 보낼 때, 나도 일주일 치 빨랫감을 가득 넣은 나만의 캐리어를 끌고 워터뷰를 나섰다. 왕복 30분, 이른바 '빨래 여행'이다. 빨랫감의 무게에 따라 빨래 여행은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짧게 끝나기도 했다. 주로 6 킬로그램 이하 세탁 코너를 자주 이용하는데 총 4.3유로가 들었고, 36분이 걸렸다. 건조기는 5분에 0.5유로를 내야 하는데, 5분 만에 뽀송해질 리가 없으니, 묻고 더블로 가서 10분 코스로 1유로를 투자하곤 했다. 이래도 제대로 마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캐리어에 넣어 가지고 와 기숙사방에 널브러 놓는다. 그런 날이면 기숙사 방에 섬유유연제 향이 가득했다.
사설 세탁방에는 세탁기와 건조기, 그리고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무료 와이파이 서비스가 있을 리 만무한 곳, 기계 안에서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을 나의 물건들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시간은 강제적이나마 디지털 디톡스의 시간이었다. 핸드폰은 잠시 주머니에 넣어두고서 전공 서적이나 한국에서 간신히 들고 온 책 한 권을 꺼내 읽었다. 가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그들을 관찰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운동복 차림에 터덜터덜 소리가 나는 걸음걸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금방 흥미를 잃곤 다시 독서로 무료함을 때웠다.
그런데 어느 날은 재미난 손님을 마주했다. 세탁기 앞을 떠나지 못하고 빨랫감과 함께 고개를 빙빙 돌려 보이시는 쌍둥이 할머니셨는데, 베이지 색 트렌치 코드까지 쌍으로 차려입으신 모습이 단정하고 귀여웠다. 덕분에 아주 잠깐, 세탁방 풍경이 영화 같아졌다.
- 뤼벤, 루벵, 르방 (Leuven, Louvain): 루벤가톨릭대학교(KU Leuven)가 있는 벨기에 제1의 대학 도시. 학생과 은퇴한 노부부의 도시로 알려져 있어 치안이 훌륭하다. 수도인 브뤼셀에서 기차를 타고 약 30-40분이면 가볼 수 있다. 구시청사와 링을 따라 조성된 구도심지 전체가 고풍스러운 대학 캠퍼스의 느낌을 준다.
사실, 위 이야기는 이전에 컨셉진을 통핸 에세이 100일 쓰기 챌린지 때, <와플의 나라에서 유럽 연합을 배우다> 매거진을 통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의 기록과 지금의 기록, 무엇이 다른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을지도?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38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 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