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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의 G, 에밀 아자르의 A

브뤼셀, 벨기에

by 프로이데 전주현

브뤼셀에 들를 때마다 트로피즘 서점(Tropismes Libraries)에 다녀오려고 애썼다. 베네룩스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걸어본다는 쇼핑 아케이드 ‘갈레리 루아얄 생뛰베르(Galeries Royales Saint-Hubert)’에 위치한 서점인데, 주로 문학과 예술 등 인문학 분야의 프랑스어 서적을 취급하는 곳이다.


서점 내부는 도서관처럼 조용하지만 전신 거울과 금빛 인테리어 장식이 어느 궁궐 못지않게 화려하다. 침묵을 유지하고 단순 명료한 프랑스어권 서적들의 표지를 구경할 건지, 무도회에 참석한 것처럼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춤이라도 춰야 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럴 땐 계산대에 계신 직원 분과 눈을 마주치고 "봉쥬르(Bonjour)!" 인사하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거울로 된 벽면 때문에 서점은 제 크기보다 더 넓어 보인다. 하긴 3층짜리 서점이니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코너는 2층이었다. 그곳에는 표지가 알록달록하고 크기도 제각각인 어린이, 청소년 책들이 가득했다. 프랑스어 실력이 초급인 내겐 최고의 놀이터였다. 어쩌다 책 제목 전체를 읽고 해석까지 성공하기라도 하면 그날의 기분은 금세 ‘좋았다’로 일기장에 기록되었다.


프랑스어 A2 단계 수업을 마칠 무렵, 베르나데트 선생님께서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셨다.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서점이지만, 때마침 살 책이 있다면야 서점 방문에 더 힘이 들어가는 법!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을 사기 위해 트로피즘 서점 문을 열었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어본 적이 있는 책인데,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어린 왕자> 같은 소설로 기억하고 있었다.


추천 도서를 찾기 위해 처음으로 2층보다 1층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직원 분께 도서 위치를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질서 정연하게 꽂혀 있는 서가에서 내 눈으로 직접 찾아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 도움 구하길 포기했다. 문학, 소설, 프랑스어 소설, 저자 명(알파벳 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낸 책이라, 가리(Gary)의 G로 책을 찾아야 할지, 아자르(Azar)의 A로 책을 찾아야 할지 애매했다. 하는 수 없이 A 섹션부터 살피는 수밖에.


책을 찾으며 프랑스어권 책들 구경을 제대로 했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크기가 꽤 작은 책들이 많았다. 경제적인 크기의 미니 핸드백에도 들어갈 만한 했고, 지하철에서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책을 펼쳐 고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책은 모름지기 하드커버여야지!’하는 집착이 덜 한 것 같아 맘이 들었다. 두 권만 장바구니에 담아도 금세 무거워지는 우리나라 책들과는 달랐다.


테두리, 제목, 저자, 출판사처럼 꼭 들어가야 하는 책 정보만을 표지에 담는 것으로 표지 디자인을 대체하는 책들도 많았다. 프랑스어 텍스트 자체가 디자인의 재료가 된다고 생각하니 말로만 듣던 프랑코포니 커뮤니티의 모국어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런 책들이 한 데 꽂혀 있는 모습은 묘한 질서감을 조성했고, 나를 포함한 방문객들에게 알게 모르게 안정감을 주었다.


필명이 아닌 본명, 로맹 가리의 G 섹션에서 <자기 앞의 생>을 찾았다. 학생들을 위한 독서 토론 질문들까지 함께 수록된 책의 구성은 일종의 수험서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책들과 달리 (아마도 주인공 모모로 추정되는) 소년의 사진이 크게 프린트된 표지 장식은 보고 있으면, 괜히 소년과 눈싸움을 하는 기분이 들었고, 내가 순간 로자 아줌마나 하밀 할아버지가 된 것만 같았다.


책을 안고 계산대로 갔다. 아저씨께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화답해 주셔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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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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