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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얻은 자(Winterholer)를 따라 중세로

호흐하임, 독일

by 프로이데 전주현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름은 뷘터홀러(Winterholer). 직역해 보니 '겨울(Winter)을 얻은(hol-) 자(-er)'란 뜻이다. '늑대와 함께 춤을'하는 인디언식 이름이 떠오른 덕에, 따로 이름을 외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름이 절로 입에 붙었다. 뷘터홀러 노부부는 일전에 소개했던 마인츠 대학교의 '지역 커뮤니티와 (유)학생 간의 교류 활성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연이 닿게 된 분들로, 헤센(Hesse) 주의 호흐하임(Hochheim)이란 도시에 살고 계셨다. 이제 막 독일 교환학기를 시작한 한국인 유학생 세 명을 위해 주말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할 정도로 사교적이셨고 유쾌하신 분들이 시기도 했다.



호흐하임 역 승강장에 내리자마자 뷘터홀러 할머니와 우리는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때아닌 통성명이 승강장 위에서 오갔는데, 이름에 지읒이 많은 나는 지읒을 독일어의 제이(J)처럼 y 발음(니은 발음)을 하지 말고 영어처럼 j 발음(지읒 발음)을 해야 된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께선 기차역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웃음까지 할머니를 꼭 닮으신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할아버지께선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시고선 오늘의 일정을 짧게 브리핑해 주셨다. 근처에서 열리는 중세시대 마켓을 구경하고 나서 집으로 이동할 계획이셨다. '공주, 기사, 길드원, 그리고... 용?' 마켓이면 마켓이지, 중세시대 마켓은 또 무엇인가.



마켓으로 걷는 내내 첫 만남다운 스몰 토크가 이어졌다. 독일엔 언제 왔니, 무얼 공부하니, 독일어는 왜 공부하니, 지내는 건 괜찮니, 특별히 먹는 건 어떻게 해결하니... 할머니, 할아버지의 질문 세례는 국적을 따지지 않았다.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조용하던 도로에 시끄러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싶더니, 저 멀리 '호흐하임 마켓(Hochheimer Markt)'이란 현수막이 보였다. 중세시대 느낌을 살린 곳은 마켓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생쥐가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 어디로 나올지를 베팅하는 중세풍 야바위 코너, 마차 바퀴를 물레 삼아 도자기를 빚는 장인, <왕좌의 게임>에 나올 법한 중세시대 로브와 <라푼젤>의 헤어스타일을 따라 해 보기 좋은 형형색색의 머리장신구까지... 중세시대 역할극에 진심인 듯한 독일 사람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콘셉트가 중세라고 판매 물건까지 그 시대에 머물러 있진 않았다. 판매품들은 오히려 지극히 현대적이었다. 생활 잡화를 한 데 모아 놓은 천막에는 형광색 실리콘이 돋보이는 주방 가전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며칠 전 마인츠 구도심지에서 본 어느 옷가게의 쇼윈도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늬 없는 형광색으로 마네킹이 두세 개 놓여 있던 그 쇼윈도는 레드, 핑크, 옐로, 블루, 블랙으로 구성되곤 하는 일본의 고전 히어로물을 꼭 닮았었다. '독일 사람들은 형광색을 좋아하는 걸까.'


마켓 구경 후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 뷘터홀러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 놀이기구들을 뒤로하고 마켓 입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트럭 상점들을 많이 보였다. 그중 한 트럭에 자연스레 이목이 쏠렸다. 마켓에 들어올 때부터 홀린 듯이 지켜보았던 과일 바구니 트럭이었다.



무대 위 연극배우의 표정 변화를 살피는 관객들처럼, 트럭을 둥그렇게 둘러싼 손님들은 일제히 트럭 위 아저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렬한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입 마이크까지 착용한 아저씨는 관객과 자신 사이에 장바구니를 좌우로 가지런히 진열해 놓는 것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독일표 골라 골라 연극은 과일의 원산지 정보로 시작해 직관적인 맛 표현을 담은 대사를 읊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저씨는 대사가 끝날 때마다, 좌에서 우 혹은 우에서 좌로 방금까지 찬양하다시피 한 과일을 바구니마다 하나씩 넣었다. 절도 있고 리드미컬하게. 사과에 관한 대사를 읊고 바구니에 넣은 다음엔 트럭 뒤편으로 가서 오렌지 한 묶음을 가져와 두 번째 대사를 시작했다.



바구니에 과일이 하나둘씩 쌓여갈 때마다 관객들의 환호성은 더 커졌다. 그럴 때면 아저씨도 "에이 기분이다" 하면서 뒤편에 놓인 재고 한 두 개를 더 가져와 바구니에 담아 주셨다. 뷘터홀러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에도 아저씨의 판매 전략이 재미있었나 보다. 순식간에 할머니, 할아버지, 한국인 셋 이렇게 다섯이서 킥킥대며 과일 바구니 쇼를 지켜보았다. 계속 보다 보니 '다음 과일은 무엇일까'하고 기대하는 마음도 생겼다.



과일 바구니의 배가 불룩해지자 아저씨는 연극을 마치고선 관객들을 대상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아저씨에게 제대로 홀린 우리는 기억력 게임을 하듯, '어떤 과일들이 담겼었더라?' 하며 대화를 나누었고, 자연스레 과일 바구니를 살까 말까 하는 쪽으로 토론을 이어갔다. "한 바구니 사가서 오늘 저녁에 디저트로 먹는 건 어때?" "양이 많은데 괜찮을까?" "우리 다섯이서 나눠 먹으면 되지!"



"맞다, 단감도 있잖아 저기!" 독일 슈퍼마켓에서 키위, 파인애플, 사과, 오렌지 구경은 많이 했지만, 딱딱한 단감을 본 적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응당 독일엔 없는 과일인가도 싶었다. 그런데 카키(Kaki) 또는 퍼시모네(Persimone)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유통되고 있다니!



뷘터홀러 할머니 쪽을 바라보며 친구가 물었다. "하나 살까요?" 할머니는 "뭐 어때(Warum nicht)?" 하시더니, 궁금하면 사 오라고 친구를 트럭 앞으로 떠밀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Danke sehr)" 하는 아저씨의 말과 함께 중세시대의 쇼맨십과 인심 한 바구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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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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