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국가들의 정치, 경제 연합체인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의 하원 역할을 하는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 EP)는 오피스가 두 곳이다. 하나는 유럽 정치의 중심지인 브뤼셀(Bruxelles)이고 다른 하나는 EP의 별장으로 불리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다. 전공 수업들은 스트라스부르를 유럽 정치의 양대 산맥,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꽤나 상징적이고 전략적인 의미를 지니는 도시이자, 유럽의 최대 국제기구인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CoE)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소개하곤 했다.
정작 심리적으로 가까운 타이틀은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의 배경 도시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스케치 배경 도시였다. 관광객들은 스트라스부르를 '크리스마스의 수도'라 부르며 독일과 프랑스의 디자인 강점이 뒤섞인 거리로 도시를 기억하곤 한다. 방금 전까지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프랑스풍 디자인을 빵집을 비롯한 여러 가게 쇼윈도에서 보았는데, 뒤를 돌아 강변 풍경을 살피면 독일 전통 가옥들이 줄지어 서 있다. 국경선을 몇 번이고 새로 그었던 비극적인 과거가 이제는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를 교묘하게 섞어 놓은 풍경을 자랑하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2017년에도 어김없이 뼈를 아리게 하는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왔다. 모두가 부활절을 준비하느라 바쁜 가운데, 학생들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와 룩셈부르크 등지로 수학여행을 준비하는 교수님들이 눈에 띄었다. 희망자에 한해서 학과 사무실에 여행 대금을 선 지불하고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혼자서는 방문하기 귀찮을 수도 있는 기관 방문이 많았다. 책에서만 보던 유럽 협력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로는 제격이었다. 나디야와 이첸, 엘스와 합심하여 스트라스부르 여행을 준비했다. 학과 사무실에 비용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아 나오는 길부터 여행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스트라스부르가 유독 기억에 남은 이유는 사실 자유시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변에 위치한 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서 알자스 지방의 특식을 주문했다. 양배추 인심이 후한 샐러드였는데, 화이트 소시지에 토마토, 치즈가 곁들여진 음식이었다. 봄날의 햇살을 받으며 야외 식사를 여유롭게 즐기다 보니 뒤이어 예정되어 있던 강변 크루즈 탑승 생각이 싹 사라졌다. 짧은 시간 내에 도시를 구경하는 방법으로 교수님들께서 계획해 두신 코스이긴 하지만 스트라스부르는 배를 타고 구경하기보단 골목골목, 걷기 좋은 도시처럼 보였다. 식탁에 둘러앉았던 우리 넷은 크루즈 탑승에 빠지자고 결론을 내렸다.
'경로 이탈' 덕분에 관광객과 현지인이 방문할 법한 곳들을 골고루 다녀보았다. 지방 명물 빵인 쿠겔호프(Kugelhof)를 판매하는 빵집, 시범 전시를 선보이며 본격적인 오픈을 준비하는 작은 갤러리, 지역 마스코트와 다름이 없는 황새 모양의 열쇠고리를 진열해 놓은 기념품 가게... 볼거리가 다채로웠기에 골목 하나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사계절 내내 판매하는 가게도 보았다. 반짝이는 조명과 형형색색의 오너먼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 계절감을 잃은 크리스마스였지만 홀린 듯이 들어갔다. 그런데 뒤편에서 익숙한 동굴 목소리가 들렸다. "너네 아까 배 탈 땐 안보이던데 뭐 했니?" 이제 막 강변 크루즈 여행을 마친 크리스토퍼 교수님이었다. 크리스토퍼 교수님은 올해 새로 부임하신 젊은 교수님이셨는데, 날씬한 거인 같으신 분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리자 교수님께선 "그래서, 구경은 잘했니?" 하며 웃으셨다. 우리 선택을 존중해 주시는 표정에 한시름 놓고선 대화를 이어갔다. 교수님은 어딜 가나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하나씩 사서 어머니께 선물로 드리는 게 자신의 여행 리추얼이라고 설명하시더니 한동안 가게 내부를 속속들이 살피셨다. 리추얼을 꼭 성공하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 모습. 덕분에 계획에 없던 트리 레이스 장식품을 나도 손에 쥐게 되었다.
가게를 나올 땐 각자 '스트라스부르 노엘(Noël; 프랑스어로 '크리스마스'를 지칭)'이라 적힌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대성당 쪽으로 걸어볼까 하는 제안에 교수님께서 자신도 같이 다녀도 될지 물으셨다. "그럼요!" 하고선 이전과는 다른 조합의 산책을 계속했다. 눈에 보이는 쇼윈도마다 멈춰 서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