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의 업데이트 신호

무라카미 하루키의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를 읽고

by 프로이데 전주현

커피 프린스 1호점, 나의 아저씨, 어벤저스 엔드 게임 (넓게는 스파이더맨을 제외한 마블 유니버스 콘텐츠), 골프, 술, 라식 수술 (또는 렌즈를 매일 끼는 삶).


주변에서 적극 권하거나 많이들 가까이하는 것들이지만 정작 내가 즐기진 않는 것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끌리지 않아서, 다른 것들이 더 매력적이어서. 남들 다 한다고 굳이 따라 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들어서. 전해 들은 게 하도 많아서 콘텐츠를 즐길 때의 서스팬스라는 게 덜해서. ‘그것들'의 리스트는 실물로 존재하지 않을 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작성되는데, 쉽게 쓰이고 쉽게 지워지기에 매번 업데이트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니깐 ’ 너 그거 안 봤잖아?’ 하는 질문을 내게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거다. 대체제를 찾는다면, ‘웬일이야? 무슨 바람이 분 거야?' 하고 묻는 게 나으리라.


최근의 업데이트를 하나 나누자면 리스트에 적혀 있던 것 중 하나가 지워졌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는 것.' 그렇다. 제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도 끌리지 않으면 안 읽고 있었다 (고전을 모두 다 읽어야만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음, 아무래도 직함을 다르게 적어야 할지도 모른다). 계기는 문학동네에서 올린 홍보 게시물이었다. 알록달록한 일러스트와 흥미로운 제목, 게다가 ‘소설가가 쓴 에세이’의 ‘걸작선’이란 소개(시인이 쓴 소설, 소설가가 쓴 논평 등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글들에게 나는 끌린다. 글쓴이를 입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바로 그런 시도들일 테니깐). 오, 흥미롭군. 오래도록 쌓아온 벽이 무너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벽 사이로 난 쥐구멍을 통해 저너머의 풍경 속에서 유머 한 줄기를 잠깐이라도 캐치해내면 그만이다. 이토록 사람의 마음은 나풀거린다. 껑충 뛴다. 프리스타일 댄스를 춘다.


오래도록 하루키를 읽어 온 친구 한 명은 반가움을 표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이 시도하고 맘에 들어한다면 괜히 내가 인정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남이라도 그러는데, 친구가 그런다면 오죽할까. 공통의 콘텐츠를 추가한 한그 친구와의 시간이 기대된다. :)


4일 동안 교토(도쿄 아니다)에 다녀온 여름날,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란 제목으로 엮인 하루키 에세이집의 1권을 다 읽었다(애초에 이 걸작선에 1권, 2권, 3권이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다. 집히는 대로 읽으면 되지 않을까?). 객관적인 관찰보단 잠깐의 관찰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상, 그리고 그 상상을 교묘히 뒤흔드는 의식의 흐름 기법. 재치가 돋보인다. MBTI에서 S 성향이 강한 남편에게도 권해보았더니, 윽 하고 비명을 지른다. 오. 힘들어하는 전개인가 보군. 그 점이 오히려 좋았다(하하). 밑줄 그은 문장들만 모아 모아 어딘가 따로 적어두다보면 아저씨의 다른 문장을 알아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음 책은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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