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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01. 2020

33. 달그락 달그락
나무로 만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016년의 마지막, 냥씨와의 겨울여행 (7)

16.12.31 토요일


냥씨가 섬나라(영국)로 돌아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설렘으로 시작했던 겨울여행은 16년도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30일 오후부터 '해피 뉴 이어'를 외치고 다녔지만 여전히 새 해를 맞이할 준비는 되지 않았다. 오늘이 정말 12월 31일이란 말인가!


마지막 여행지는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en, Anvers)로 정했다. 길드 상권으로 일찍이 부유했던 도시는 화려한 중앙역과 '파트라슈 성당'이라는 별명이 붙은 대성당, 그리고 루벤스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한 제과회사에서 일하시는 고모부께서 벨기에에 나와 일하고 계실 때 찾았던 나의 첫 유럽 여행지이기도 하다. 이전에 가족들과 함께 걸었던 여행지를 냥씨와 걷고 있으니, 여행 내내 고모부와 고모, 그리고 반려견 하늘이가 생각이 났다. 한 번 여행지로 찾은 곳은 영원히 그렇게 마음속에 남아 있나 보다. 


당시 고모부께서 나를 끌고 간 한 식당에서 아이스크림 와플을 정말 맛있게 사 먹은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내가 냥씨를 그곳으로 끌고 가기로 했다. 그때 이후로 시간은 참 속절없이 흘렀는데 와플 맛은 여전하다. 바삭하고 달콤하다.


식당 내부에서 썰어 먹는(?) 와플이기에 다른 길거리 와플보다는 좀 더 돈을 써야 하지만. 추억의 와플을 위해서라면!



와플을 먹은 후 우리는 조금은 독특한 산책에 나섰다. St.Anna's Tunnel이라고 알려진 한 터널을 걸어보기 위해서인데, 이 터널은 안트워프를 가로지르는 스헬데/에스꼬 강(Scheldt)을 땅 밑으로 걸어서 건널 수 있게 해 놓은 터널이다. 보통은 자전거를 타고들 그렇게 건너간다고 하는데, 냥씨와 나는 그저 걸었다. 미술 시간에 배웠던 소실점을 운운하며, 강 밑 터널을 걷는 느낌을 운운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터널보다도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나무로 된 에스컬레이터였는데,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가끔 내는 게 꼭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었다. 1931년부터 계속 운영 중인 에스컬레이터라고 하니 이 곳의 나무 손잡이를 잡았을 사람들 중에 유명인사들도 꽤나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서도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달그닥 달그닥 



앤트워프 중앙역에서 냥씨와 헤어진 나는 21시쯤 뤼벤 기숙사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간에 냥씨에게서 런던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제 방학 끝났다!" "그러네..." 하는 대화가 몇 번 오가고선 2017년도 힘내자라는 인사말을 서로 건넸다. 빨래 여행을 위한 준비물들을 따로 정리해두고서 1월 1일 전야제로 떠들썩한 기숙사 건물에서 홀로 조용히 라디오를 들으며 한 해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어떻게 한 해 동안 좋은 일만 있었겠느냐만은 (이맘때만 되면 참 신기하게도?) "고마웠어"하는 말만 늘어놓게 된다. 2016년, 고마웠어. 그리고 2017년, 고마울게. :)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우선 해피 추석입니다 운스 여러분. :) 10월이라니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4년 전 12월 31일의 일기를 돌아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군, 시간한테 된통 당하는 모양새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드네요. 올해 12월 31일에도 '고마웠어'하고 중얼거리고 있을까요?

앤트워프의 강 밑 터널을 걸으면서 참 막막한 기분이 들었던 게 기억나네요. 분명 터널의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질 않는 거예요. 답답한 기분이 들자 괜히 터널 위 강물이 나를 거세게 눌러버릴 것만 같더라고요. 무언가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때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해주는 냥씨를 보며 힘을 낼 수 있었어요. 바로 지금 우리들 옆에 있는 사람들, 함께 티격태격 이야기를 하고 밥을 나눠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내듯 말입니다. 

 '생존하거나 건강하면 그걸로 충분한 게 2020년'이라는 무서운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많이 합니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한 2020이에요. 올해 12월에는 어떤 일기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무엇이 되었건 4년 전의 일기처럼, 고마움이 가득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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