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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감사하게도 서울에 사는 동안 택배 주문 시 적어낼 주소 하나쯤은 늘 있었다. 학창 시절 외우던 세계사 연표처럼 웬만한 노래보다도 리드미컬하게 주소를 읊었다. 도로명 주소와 그 전의 것 모두 다, 우편번호까지. 하지만 언제라도 집이라 부르는 공간과 헤어질 수 있는 처지였다. 세입자의 삶은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지붕이 되어 주는 건물과 동네에 정을 주지 않는 건 싫었다. 어쩐지 인간적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에 보란 듯이 사는 곳 주변에 이야기의 씨앗을 여럿 심었다. - <이번 역은 압구정역입니다> 중에서


지음지기의 세 번째 책을 만들 시간이 왔다. 아니, 책을 두 권 편집해 2024 제주 북페어에 다녀온 거 아니었냐고? 맞다. 제주에 들고 가는 지음지기 책은 두 종류가 적당할 것 같았다. 세 번째 책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었다. 앞선 책들과 다르게 편집에 시간을 좀 더 많이 할애하고 싶기도 했고. 제주 북페어 참가 이후로 일부러 미뤄두었던 일이었다.


어떻게 단기간에 책을 세 권이나 낼 수 있었느냐고? 지음지기가 약 1년 2개월 동안 달려왔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거의 끝나갈 때였다. 3개월마다, 거의 한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독립출판 프로젝트를 하나씩 끝냈다. '선 온라인 연재, 후 편집 및 출판'이라는 시스템 덕분에 글과 그림의 탑을 꾸준히 쌓을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데드라인이 있어야 일한다. 프로젝트 기역(ㄱ)은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로, 니은(ㄴ)은 <너와 나의 니은>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이젠 디귿(ㄷ) <이번 역은 압구정역입니다> 차례였다.


원고는 준비되어 있었다. 온라인 발행 후 시간도 꽤 지났으니 편집하기에 최적의 온도로 식어 있었다. 제삼자의 안경을 끼고서 빨간펜으로 이리저리 문장을 고칠 의욕이 생겼다. 콘셉트도 있었다. 세 번째 책에선 그리는 사람이 그림만 그리지 않는다. 글도 쓴다. 쓰는 사람이 글만 적지 않는다. 낙서를 한다. 저자 표기도 글 전주현, 그림 최정연에서 전주현, 최정연으로 바꾼다. 글과 그림의 벽을 허문다. 다만, 그리는 사람의 시선과 쓰는 사람의 시선을 그 어느 책보다도 또렷하게 구분한다. 정연이의 글과 그림이 주르륵, 그다음에 나의 글과 그림이 주르륵. 두 개의 섹션으로 나눈다. 정연이의 에세이는 추억으로 분류하고 나의 에세이는 기록으로 분류해 두었는데, 말하자면 '오래된 순'으로 에세이를 나열한 것이다. 이런 콘셉트와 연출이 가능했던 이유? 세 번째 책이 정연이의 어린 시절과 나의 청년시절의 교집합인 동네, 압구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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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디귿 홍보물: 최정연의 압구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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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디귿 홍보물: 전주현의 압구정 #3



동네를 디귿의 키워드로 제안한 건 나였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에도, 저자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기에도, 독자가 접근하기에도 보편적인 소재인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서울살이 중에 고향인 대구를 찾을 때마다 느꼈던 감정을 붙잡고 싶어서였다.


대구는 오래 살았던 곳이라 그런지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잊고 지냈던 일화와 감정을 불쑥불쑥 소환했다. 오래된 친구, 어린이었던 나, 미친 듯이 좋아하던 것, 싫어하던 것... 학창 시절과 가족과의 시간에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옛날 일로 퉁쳐지는 것들이 한번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 감각이 꽤 생생했다. 타임머신이 필요 없었다. 오래 살던 동네를 걸으면 '굉장히 사적이어서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역사'가 되살아났다. 그게 참 소중했다. 그 느낌을 감각이라 설명할지 기억이라고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오래도록 '그 애매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아쉽게도 서울행 기차 안에서 졸음기 뒤섞인 헤드뱅잉을 몇 번 하면 '그 애매한 것'은 다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그러다가 다시 대구를 찾으면 또 튀어나왔다). 서울역에서 내리는 나를 맞이하는 건 서울의 감각, 서울살이에 어울리는(그렇다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향수병인가.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은데.'


'그 애매한 것'이 언제 나를 찾아왔다가 떠나는지 돌아보았다. 그러자 동네란 키워드가 떠올랐다. 내가 살았던 곳, 내가 잠들었던 곳, 내가 들어왔다가 나갔던 곳... 생각의 시작점은 과거였다. 그런데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생각을 늘려 보니, 현재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자는 곳, 내가 들어오고 나가는 곳... 옛날 동네가 선사한 '그 애매한' 감각과 생각은 가까운 과거이자 현재의 공간, 서울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자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정연이를 처음 만났던 동네, 압구정을 돌아보게 되었다. 정연이에겐 어린 시절의 공간이었으나 내겐 청년시절의 공간.


'나와 정연이가 압구정을 걷는다면 '그 애매한' 감각이 겹칠 수는 있겠지. 하지만 필시 다르겠지.'

함께할 수 있는데 또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라니. '이거다! 디귿은 동네로 해야겠어.' 신이 났다.


오래전부터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꼭 피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바로 살고 있는 동네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누군가에겐 첫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편한 주제일 수 있지만 나에겐 이 질문이 유독 난감했다.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 말에 솔직하게 '압구정동에 살아요'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의 눈빛이 갑작스럽게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들은 나를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여기거나, 잘난 부모 덕분에 금수저 인생을 살고 있는 아이로 단정 지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로 그 눈빛을 다시 보기 무서워 사람들이 다시 물을 때를 대비해 우회적인 답변을 여럿 준비했다. - <이번 역은 압구정역입니다> 중에서


아이디어를 들은 정연이의 표정은 고요했다. 신중함이 가득해 보였다.

"별론가?" 머리를 괜히 긁으면서 답을 기다렸다.

"재밌을 거 같아요."


이참에 정연이도 글을 길게 써보자는 말엔 긴장한 듯했다.


"언니도 다이어리에 끄적이듯이 그림을 그려보면 어때요?"

"좋지!" 그림으로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긴 해도 너무 쉽게 답했다(그림은 어렵다).


"세 번째 책은 대주제가 명확한 책이 될 거야. 숲도줍이나 너나니와 비교했을 때."

"그만큼 읽으려는 사람이 적진 않을까요?"


정연이는 자신에게 소중한 이야기가 남들에겐 너무 사적인 이야기로 비치진 않을지 걱정했다. 보편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할까 봐, 우리끼리만 재미있고 말까 봐. 그 맘이 무슨 마음인지 알 것도 같았다. 본인의 이야기는 궁금해하면서 남의 이야기엔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보였다. 특히 학교를 벗어난 사회에서. 나 스스로도 사적인 게 소중하다면 사적인 건 사적인 걸로 남겨두어야 계속 소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세 번째 책 오프닝 글에서 적어두었듯이). 그렇지만 왠지 고집하고 싶었다.


"근데 정연아, 우리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은 다 사적인 이야기들이었잖아. 나만 이런 거 아니네, 이 사람이 이런 얘기하니까 그게 떠오른다, 나는 어떤 동네에서 살았더라... 뻗어나갈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아."

정확히 저렇게 말한 건 아니었을지 몰라도 정연이와의 프로젝트 디귿(ㄷ) 기획 회의는 비슷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2024년 여름, 우리는 다시 한번 책 만들기 공장장이 되었다. 끝날 듯하지 않는 퇴고, 쌓여가는 인디자인 파일,... 그렇게 압구정의 트레이드 마크, 오렌지색이 어울릴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지음지기(@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그리는 사람 최정연 │쓰는 사람 전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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