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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혹시 인디 음악 좋아하세요?" "가끔 들어요." "이 책(너와 나의 니은) 보다가 문득, 박소은의 '너는 나의 문학'이란 노래가 떠올라서요. 한번 들어보셔요." - 2024 제주 북페어에서, 지음지기 부스를 찾은 한 독자님과의 대화 중




드르륵드르륵. 캐리어 바퀴 소리가 요란했다. 북페어장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2024 제주 북페어 포스터가 줄지어 붙어 있었다. 절대 길을 잃지 않게 하겠다는 주최 측의 의지가 돋보였다. 페어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벌써 부스 설치를 마친 팀들이 여럿 보였다. '001 CREATOR 지음지기'라 적힌 목걸이를 걸고서 짐을 풀었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DP 회의에서 결정지은 모양 그대로 재현하기면 하면 되는 되었는데도 괜히 떨렸다. 쿵쾅대는 마음에 괜히 시간이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 책과 소품을 비치하는 건 쉬웠다. 문제는 백월(back wall) 꾸밈용으로 가져온 캔버스였다. 정연이가 손수 지음지기 로고가 그려 놓았었는데, 캔버스 무게가 생각보다 꽤 나가서 백월 고정핀이 견디지 못했다. '신경 써서 그려온 건데 못 쓰면 어떡하지, ' 하며 걱정하던 중, 정연이가 캐리어에서 가위를 꺼내 들더니 캔버스 한쪽을 과감히 잘라냈다. 여백을 덜어내 무게를 줄이려는 거였다. 그때 그 몸놀림이 어찌나 단호하던지. 멋있었다.


DP 회의 때 생각했던 그림과 북페어장의 풍경이 비슷한지 몇 번이고 점검했다. 방문객의 동선에 따라 부스 앞쪽에 서서 책과 소품들을 만지작거렸다. 책 뒤에 책 소개문을 숨겨 놓음으로써 책을 일단 손에 들어야 소개문을 읽을 수 있게 했는데, 그때 그 책 소개문이 보이는 각도가 괜찮은지 가장 먼저 살폈다. 우리가 부스를 지키면서 구두로 책에 관해 설명할 준비도 되어 있었지만, '내게 제발 말을 걸어주지 말아 주세요. 조용히 보고 싶어요.' 하는 방문객들을 위해 마련해 둔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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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 뒤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도 점검을 계속했다. 테이블 아래, 앉은자리 무릎 앞의 공간을 정리했다. 체육관에서 열리는 행사라 전체적으로 좁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지만 부스 사정을 달랐다. 방문객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에 비해 부스와 부스 사이의 간격은 밀도가 꽤 높았다. 테이블 밑 공간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다른 부스에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무릎 앞, 발 밑을 제대로 정리해 둔다면 재고 파악도 결제도 좀 더 신속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각종 박스와 캐리어를 간이 창고 역할로 쓰기로 했다.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니 어느덧 북페어 시작 시간이 5분 정도 지나 있었다. 오픈런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한두 명씩 입구에서 페어 팸플릿을 갖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음지기의 그렇게 얼렁뚱땅, 스리슬쩍, 웅성이는 체육관 안에서 데뷔했다.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릎에 힘을 빡 쥐고서 부스 테이블 뒤편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방문객 한 분 한 분을 눈으로 맞았다. 부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시는 분들에겐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글과 그림의 대화를 연습하는 지음지기입니다."


이게 뭘까, 하면서 가까이로 오시는 분들.

팸플릿 지도를 살피며 "여기가 1번이네" 하고 말하시는 분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책을 뒤적이시는 분들.

책보단 소품에 눈독을 들이시는 분들.

증정용 스티커를 보고서 "이거 가져가도 돼요?" 하시는 분들.

백월을 보시며 "지.. 음지기..." 하며 읊조리시는 분들.

정연이와 내가 설계한 대로 책을 찬찬히 살펴주시는 분들.

책을 보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물어보시는 분들.

잠깐 보시더니 훈계를 하고 가시는 분들...


예비 독자님들의 행렬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어느 한 분이 책을 찬찬히 보시다가 물으셨다.


"작가님이세요?"

"네."


대답 후 얼굴이 화끈거렸다. 온라인 연재를 할 땐 그렇게 떵떵거려놓고선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스로를 작가라 소개하니 괜히 부끄러웠다. 그분께선 작가가 직접 책을 팔러 나온 점이 특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시고선 책을 아주 찬찬히 보고 가셨다. 어느 페이지에선 꽤 오래 머무르셨는데 그분 뒤쪽으로 걸어가 "어느 페이지 읽으셔요?" 하고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물론 그러지 못했지만). 그분 다음에 오신 분들 중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하고 가신 분들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책을 사갔고 나머지는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으며 또 일부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셨다.


누군가 내 책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모습엔 너무 감사했다. '어, 이게 되네? 누가 내 글을 사서 읽어!' 하는 기쁨을 처음 느꼈다. 황홀감에 부스 사진을 괜히 계속 찍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의자에 앉고 싶어졌다. 하루 종일 자리를 지켜야 했으니 체력 분배가 중요했다. 정연이와 번갈아가면서 섰다가 앉았고 앉았다가 섰다. 팀이라 다행이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한 명이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되었으니 다른 부스 사정이 궁금하면 "나 한 바퀴 돌고 올게." 하고 북페어 구경을 나섰다. 연차를 내고 열정페이 아르바이트생 자격으로 남편까지 합세하자 더 여유로워졌다. 생명수(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당길 때면 누군가 대표로 체육관 밖에 음료를 사러 나갔다. 덕분에 북페어가 있던 이틀 내내 굶주릴 새가 없었다.


제주에서 열리는 북페어라 그런지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았다. 2030 여성만 있지도 않았고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계획하고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지나가다가 홍보물을 보고 들어온 사람들), 한 6.5 대 3.5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좌석이 많은 것도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었다. 관중석이었을 좌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자 인기 종목 스포츠에 출전하는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부스를 둘러보는 것 말고도 할 게 참 많았다. 제주에 관한 전시와 각 부스에서 추천한 책들을 전시하는 코너, 업사이클링 에코백과 중고 에코백 나눔 존 등도 마련되어 있었다. 참가팀 자격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코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느라 바빴을 거다.


쉬는 시간이랍시고 정연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관중석에서 북페어 풍경을 내려다봤을 때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책을 보겠다고 책문화를 즐기겠다고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 그 뒤로 오색의 띠들이 장식된 풍경. 영락없는 책운동회였다. 콘셉트 한번 제대로네 싶었다.



이틀 내내 방문객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이따금 소강상태 같은 때도 있었는데 그때야말로 참가팀들의 단체 쉬는 시간이었다. 그때 좀 더 면밀히 우리 부스 말고 다른 부스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001 부스였던 우리에겐 이웃 부스가 단 하나였는데, 그곳엔 (지금은 친한 동료가 된) 정담아 작가님이 홀로 부스를 지키고 계셨다. 간식을 나눠먹었고, 서로의 독립출판물을 구경하면서 글을 쓰게 된 계기 등을 짧게 나누었다. 처음이라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단답만으로 근근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남편이 그 대화를 살렸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담아 작가님의 리엑션을 이끌어 낸 남편 덕분에 나도 좀 더 용기가 생겼다. 쓰는 사람끼리 함께 나눠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명함을 주고받고 인스타와 브런치를 서로 팔로우했다. 작가 대 작가의 만남이라니. 이것도 독자와의 만남 못지않게 묘하게 간지러웠다.


그러다 이야기가 깊어져서 다시 한번 용기 내어 질문했다. 왠지 모르게 나와 비슷한 작업 환경과 고민을 지닌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작가님,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싶지만... 혹시 쓰고 싶은 글의 형태? 성격? 그게 에세이신가요?"

"사실 전 시나리오 쪽에도 관심이 많아요. 드라마 각본 같은 거."

"신춘문예 등단이나 소설 같은 건요? 저는 사실 소설을 쓰고 싶거든요."

"오, 저도요! 관심 있는데 준비가 덜 된 건지, 용기가 없다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요."


예비 독자님들을 만날 때와는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 각개전투를 벌이듯이, 고독한 창작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동료라 부름 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었는데. 담아작가님을 시작으로 알음알음 만날 수 있었다. 샤샤미우 작가님, 토끼풀 작가님, 일찍이 글월세 프로그램을 통해 연을 맺었던 엄선 작가님까지. 화장실 다녀오다가 마주치면 기분 좋게 인사하고, 한 바퀴 둘러보다가 초콜릿을 하나 슬쩍 던져 주고 가고....... 참가팀이나 작가들 간의 교류 시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진 않았지만 짬짬이 어떻게 말을 섞었다. 그러자 마음도 자연스레 섞었다.


꼬박 이틀 붙어 있었다. 그랬을 뿐이다. 그런데 그새 익숙해졌다. 스스로를 작가라 소개하며 작업의 고충을 나누는 시간이. 부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에게도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팀 소개, 책의 특이점, 지음지기의 메시지 등 오래 연습한 연극 대사처럼 매끄럽게 읊었다. 데뷔 무대의 막이 내렸다. 성공적이었다.


+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 정연 작가의 2024 제주 북페어 후기(읽기)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지음지기(@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그리는 사람 최정연 쓰는 사람 전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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