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백약이오름에 오른다 제주에서 가장 많은 것 하나가 나를 헝클어뜨린다 질끈 묶은 머리에서 머리카락을 한두 가닥 끄집어낸다 순식간에 산발이 된다 - <틈글집: 열두 달 이야기> 중에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두 달마다 반장과 부반장을 뽑았다. 남자 반장, 남자 부반장, 여자 반장, 여자 부반장 이렇게 넷이 한 팀이 되었다. 좀 더 많은 학생들이 리더의 역할을 경험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학교가 설계한 것이라고 했다.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었을 텐데, 세심하기도 하지.
학생들은 여름 방학 이후 치르는 4기 반장 선거를 가장 주목했다. 그 선거에서 이기면 9월과 10월 두 달을 맡게 되는데, 10월 초에 한 학년의 하이라이트인 운동회가 있었다. 특별히 반장은 운동회에서 반을 대표해 운동회 날에 깃발을 드는데, 그게 또 또래들 사이에선 그렇게 명예로운 일이었다. 너도 나도 엄숙한 표정으로 깃발을 들고 친구들을 이끄는 모습을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반장 감이던 친구들 중에서 인기가 많은 친구들은 4기 선거에 나가려고 1~3기 선거 입후보를 건너뛸 정도였다.
2024 제주 북페어의 참가팀으로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자, 4기 반장 선거에서 이긴 기분이 들었다. 치열했지만 재밌었던 그 시절 운동회를 떠올렸다. 제주 북페어의 콘셉트가 '책운동회'였고 장소도 한라 체육관이라는 안내 때문이었다. 관련 사진을 찾아보니 색동저고리를 닮은 띠들로 체육관 천장을 꾸며 놓았었다. 운동회 날, 나무마다 걸려 있던 만국기 가랜드가 떠올랐다. 북페어 현장 사진을 보니 정연이와 별도의 오프라인 회의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음지기의 공간, 부스를 꾸밀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이름하야 DP 회의. 남들 시선 걱정 없이 편하게 브레인스토밍을 할 수 있는 곳(우리 집)으로 정연이가 오기로 했다. 우리 두 사람의 분위기가 드러날 수 있도록 아기자기한 소품을 가져와 지음지기의 책 두 권, 정연이의 책 두 권, 나의 책 한 권을 맘껏 진열해 보기로 했다. 그간 다녔던 각종 페어나 상점들의 매대를 떠올리며 이것저것 챙겨보았지만, 의외로 책 설명 카드 하나 놓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부스 홍보물을 걸어두는 백월(back wall)을 어떻게 할지(부스의 배경색을 정하는 일), 부스 테이블을 무엇으로 덮을지(부스/책 진열대의 바탕색을 정하는 일), 책을 한 권씩 올려둘지, 여러 권 쌓아둘지, 증정용 스티커를 어떤 식으로 비치할지, 독자가 잠시 머무르다 갈 수 있는 체험존(스탬프 찍기)을 따로 만들지, 책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으로 무엇으로 쓸지...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서 물건 배치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분위기가 조화로운지 따졌다.
편안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 코지(cozy), 웜(warm), 아날로그(analogue), 패치워크(patch work), 놀이(play)... 판매대보다는 전시대 느낌이 들도록. 기왕이면 제주의 이미지와 펼침면으로 전시할 책의 이미지와도 어울리도록. 나의 취향을 알고 친구들이 일찍이 선물해 줬던 소품들(자석 보드, 티타월 등)이나 내가 여기저기서 사모았던 소품들(클립, 스탬프잉크, 인형 등)이 유용히 쓰였다.
부스에 재미를 주기 위해 후원자 코너를 마련해 보기로 했다. 후원자는 다름 아닌 우리 두 사람의 어머니들이었는데, 소소하게나마 팀 운영에 보태라고 용돈벌이 용 소품들을 몇 개 준비해 주셨다. 정연이 어머니께서 지음지기의 책이 쏙 들어가는 수제 북파우치를 만들어주셨고, 우리 엄마는 오랜 취미인 퀼트로 만든 북코스터(책갈피 겸 티코스터)를 몇 개 챙겨주었다. 그 물건들을 어떻게 배치할지도 논의했다. 양 옆에 다른 부스가 있지 않았기에 부스 오른쪽 공간에 진열해 두기로 했다.
보이는 부분을 어떻게 할지 얼추 정한 뒤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준비했다. 김포-제주 왕복 항공권을 결제하고, 숙소와 렌터카를 예약했으며, 판매 내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엑셀 시트를 만들고 결제 시스템(카카오페이 QR코드 제작과 송금 계좌 정보 정리)을 확정 지었다. 정연이는 약 대신 매일 먹는 가루 비타민을 챙겼고 백월에 걸 지음지기 로고를 그렸다. 나는 북페어 시작 이틀 전에 도착해서 함께 끼니를 해결할 식당들을 지도에 표시해 두었다. 누가 지음지기 아니랄까 봐, 알아서 척척 분업을 해냈다.
3월 말. 제주에 도착했다. 초등학생 때 가족 여행으로 한 번 오고, 벨기에로 유학을 가기 전에 제주 환상 자전거길 종주를 한답시고 친구와 함께 온 게 그다음이었으니, 내겐 세 번째 제주였다. 제주에 일을 하러 오다니(물론 놀았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돌하르방이 반겨주는 제주 공항에서 수하물 찾기를 가디라며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묵직하게 끌고 온 캐리어가 한번 비워지고, 다른 것으로 채워 육지로 돌아가는 거다. 매대에 올려둘 책은 많이 팔고 북페어에서 새로 만난 책들은 가득 담아 가지고. 얼마나 좋을까!
숙소에 체크인하자마자 캐리어를 열어 책 상태부터 확인했다. 바닥에 끌고 다니느라 혹 상하진 않았을지 표지와 모서리 부분을 꼼꼼히 살폈다. 주최 측에서 보내 주었던 공지 메일도 다시 읽었다. 참가비(부스비)가 없다는 내용에 다시금 눈이 갔다. 아무래도 북페어 장소가 제주였기에 왕복 항공권과 숙박비라는 비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돈을 아낄 수 있었다(그 돈 아껴서 다른 부스에서 팔던 흥미로운 책들을 구매했다). 점심도 챙겨주신다고 적혀 있었다. 별도의 식사 시간 없이 부스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꼬르륵 소리의 방해 없이 독자분들을 만나 뵐 수 있겠다 싶었다.
이토록 참가팀들을 챙기는 주최 측은 어떤 표정으로 북페어 현장을 지키고 있을까? 한라체육관에서 만날 얼굴들에 관한 상상도 했다. 그리고 이틀 간의 북페어 동안, 배려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첫째 날 아침에 전달 주셨던 참가팀 목걸이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심장 위에 꽂아 다니던 4기 반장 명찰이라도 되는 듯이, 지음지기라 적힌 이름을 자랑스레 전시하며 한라체육관 안을 누볐다.
(제주 북페어 그 현장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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