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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책 도둑

<어린 왕자> 한 권

by 프로이데 전주현

정리하기 유독 어려운 물건이 있다. 어른들은 내게 그 물건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때문에 비가 오는 날에 내 머리 대신 그 물건 위로 우산을 씌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가 까다로운 물건이어서 오래 끼고 살려면 골치가 아프기도 하다. 가끔은 집먼지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같고, 물과 햇빛에 금세 시들시들해지는 게 음지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블루스타고사리를 닮기도 했다. 물건의 표면은 대체로 평평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무궁무진한 입체감을 자랑한다. 덕분에 순식간에 마법학교에 갓 입학한 안경쟁이가 될 수도 있고 코끼리와 친구가 된 펭귄이 되어볼 수도 한다.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 같더라도 안에 담긴 내용의 깊이와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하면 여전히 평가절하되고 있는 물건이다.


(어떤 물건인지 눈치챘는가?)


바로 책이다.




우리 집엔 책이 많다. 그래도 어떤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는 알면서 산다.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카오스가 따로 없다. 다행히 내 머릿속에 책장의 코스모스가 유지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조만간 큰 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책장을 가만히 내버려 둔 지 15년이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책장을 방치했다간 집 전체가 책먼지를 뒤집어쓸지도 모를 정도다. 정리가 시급하다.


오랜만에 체중계 위에 올라가 '언제 이렇게 쪘지?' 하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게도, 방치된 책장은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살을 찌운다. 책이 많아지는 일은 있어도 줄어드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책과의 이별이 쉽지 않다는 것도 한몫한다. 이젠 더 이상 읽지 않을 책이더라도, 사놓고서 펼치지 않은 책이더라도, 쉽게 버릴 수가 없다. 어른들의 가르침이 꽤 효과적이었나 보다.


가만 보니 엄마도 나와 비슷하다. 엄마의 책장 맨 위칸에는 옛날 책들이 꽂혀 있는데, 그중에는 한자와 한글이 뒤섞여 있거나 일본책처럼 본문을 세로 쓰기로 배치한 책들도 있다. 종이가 누렇게 변한 외서들도 몇 권 보이는데 빈티지한 디자인이 지금 봐도 멋스럽다(세월을 머금은 종이 냄새도 중독적이고). 책 여백에 영단어 뜻을 찾아 메모를 해둔 엄마의 글씨를 보는 재미는 덤이다. 엄마는 대체로 책을 펼치면 나오는 색지에 언제 어디서 산 책인지, 누구의 책인지(자신의 이름)를 꼭 적어두었다. 책과 계약서를 쓴 흔적 같다. 잘 읽겠습니다, 소중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인사 같다. (아, 이러면 더 못 버리지...)


그런 엄마의 책 중에 내가 일찌감치 서울로 가져온 책이 있다. 소담 출판사에서 90년대에 펴낸, 정가 4,000원의 세계 명작, 쎙떽쥐뻬리(판권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의 <어린 왕자>다.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야기다. 누구나 집에 <어린 왕자> 한 권씩은 갖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게도 나의 서가에는 엄마의 <어린 왕자>를 포함해 총 여섯 권의 <어린 왕자>이 꽂혀 있다.




엄마는 이야기를 사랑했다. 이야기를 담아낸 책도 사랑했다. 특히 <어린 왕자>는 언제든 다시 꺼내 읽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읽을 때마다 감상이 새로운 게 매력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이야기라고 했다. 나름의 추천사였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그렇게 말했다. 다만 그 시절의 나는 엄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보아뱀 에피소드에 까르르 웃었고, 글보다는 그림을 구경했으며, "장미가 이쁘다! 바오밥 나무가 징그러워!" 하는 식으로 <어린 왕자>를 즐겼다.


그 시절의 우리 가족에겐 일요일 루틴이 있었다. 부랴부랴 아침을 챙겨 먹고 교회에 가는 게 시작이었다. 디즈니 만화 동산을 보고 싶었던 나는 꾀병을 많이 부렸다. 어찌어찌 교회에 따라갔더라도 설교 시간에 많이 졸았다. 엄마 아빠는 2층에서 어른 예배를 드렸고 나는 1층에서 어린이 예배를 드렸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점심시간이었다. 교회에서 준비해 주는 점심은 메뉴가 매주 같았다. 주말가족이었던 우리는 셋이서 점심 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핑계 삼아 밥때마다 교회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주변에 먹을 곳이 많았다. 칼국수나 재첩국, 쌈밥, 삼계탕 전문점을 주로 찾아다녔다.


무엇을 먹었건 간에 배를 채운 후엔 꼭 서점으로 갔다. 교회 근처의 지역 서점이었다(기억하기로는 서점 이름이 하늘땅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진 않다. 확실한 건 이름에 하늘이 꼭 들어가 있었다). 살 책이 있건 없건 그 서점에 들렀다. 일종의 놀이터였다.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책을 들여다볼 때도 많았고, 긴 글로 읽기 싫었던 고전 소설의 만화 버전을 구경한 적이 가장 많았다. 삼성 어린이 문고와 맹꽁이 서당, 아스테릭스 만화를 많이 사 읽었다.


서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붙어 다니던 우리 셋은 서점에 들어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바박 흝어졌다. 어린이 서적, 문학, 비문학... 각개 (독서) 전투를 적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 가까이 벌였다. 아마 그때, 책과 친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책 친화적인 공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책의 냄새와 디자인, 무게, 말투에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의 가르침도 은연중에 더 잘, 콕 박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어린 왕자>를 나의 짐가방에 쑥 넣어서 서울로 왔다.




집 떠나와 엄마의 <어린 왕자>를 찾아 읽을 때의 나는 이전과 달랐다. 주민등록증에다가 운전면허증까지 갖고 다닐 나이가 되었고, 유럽 언어를 공부하면서 <어린 왕자>를 다양한 언어로 읽고 싶어 했다. 내가 익숙한 <어린 왕자>는 한국어판일 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원문(프랑스어판)이 어떻게 쓰였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전공 언어였던 독일어판이 한국어판과 어떻게 다를지도 궁금했다. 언어가 달라도 이야기가 같다면 여전히 감동적 일까? 자잘한 번역의 기술부터 책의 디자인까지, <어린 왕자> 덕분에 질문을 많이 했다. 나도 엄마의 딸인지라, <어린 왕자>를 많이 좋아했다.



나의 서가에 놓인 여섯 권의 <어린 왕자> 책들


[왼쪽 사진 설명]

한국어판 <어린 왕자>(엄마가 산 것. 첫 장엔 엄마가 직접 자기 이름을 적어 두었다)

프랑스어판(원문) <어린 왕자> (하나는 파리에서, 하나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구입)

독일어판 <어린 왕자>(내가 직접 산 것, 엄마 친구분이 주신 것(빈티지))

경상도 사투리판 <애린 왕자> (너무 재미난 기획이다. <어린 왕자>를 사투리로 읽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한 사실, 영문판 <어린 왕자>가 아직 집에 없다(이럴 수가!).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사실, 엄마의 책장엔 베네치아 사투리판 <어린 왕자>가 아빠의 책장엔 중국어판 <어린 왕자>가 꽂혀있다. 하나는 신혼여행 중에, 하나는 대학부 단기 선교 중에 엄마, 아빠를 생각하며 샀던 책들이다. 어딜 가든,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어린 왕자>는 좋은 선물이 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엄마의 추천사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랐다.


어릴 적 이뻐 보였던 장미는 얄밉게 읽히는 때가 더 많아졌다. 그러다가 어떤 날엔 나도 장미처럼 까탈스러운 연인이 되어 보고 싶어졌다.

묵묵히 집을 청소하고 장미를 사랑하는 왕자는 전혀 어려 보이질 않았다.

왕자가 방문하는 소혹성의 주민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고서 퍽 서글퍼졌다.

가로등 불을 켰다 껐다 하는 소혹성의 이미지가 멋져 보였다.

조종사 아저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왕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사막여우의 대사에 집중해 보라던 논술학원 선생님의 말이 이따금 떠올랐다. 길들여진다는 건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관계일까?

장난 삼아 물 수도 있다는 뱀이 한없이 무서워졌다.

이 책을 어린 시절의 레옹 베르트에게 바친다는 문장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 부분만 몇 번씩 읽기도 했다.

내가 사는 별은 어떻게 생겼을지 이따금 상상했다.


책장에 꽂혀 있을 땐 그토록 얇은 책이 펼친 후에는 어쩜 이렇게 광활해지는 걸까. 이야기의 힘을 다시금 느꼈다.




벌크업을 멈출 줄 모르는 나의 책장은 앞으로도 몇 번이고 뒤집혀야 할 거다. 그렇지만 엄마의 이름이 적힌 <어린 왕자>는 늘 꽂아두려고 한다. 이 책과는 이별하지 않을 거다. 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오늘 엄마의 이름 옆에 내 이름을 나란히 적어 두었다. 비로소 정의로운(?) 책 도둑질이 완성된 기분이다. 만약에 이 책과 헤어진다면, 그땐 나의 딸이나 아들 되는 누군가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애정과 궁금증을 가득 품고서 엄마의 책을 가져간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추신. 생각해 보니, 내가 <어린 왕자>를 가져오는 바람에 엄마는 <어린 왕자>를 읽고 싶을 때마다 읽지 못하고 있으려나? 갑자기 미안해진다. 책과의 이별은 엄마에게도 쉽지 않을 텐데. 내친김에, 올해 엄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어린 왕자>로 할까? 괜찮을 거 같다.



엄마의 이름 옆에 내 이름을 적었다. 비로소 책 도둑질이 완성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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