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삐뚤빼뚤한 길

성경책 퀼트 커버

by 프로이데 전주현

엄마는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지 못했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데도 그랬다. 초보자가 조금씩 움직이는 손, 하나둘씩 누르는 건반은 아마 엄마에겐 너무 답답했을 터. 자기 자식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면서, 엄마는 나를 동네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학원 선생님에게 당부했다. 이론 같은 거 가르치지 말고 피아노를 즐겁게 치는 법만 가르쳐 달라고. 피아노와 놀다 오게 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선생님은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10번 연습하고 검사 맡아, 5번 연습 더 하고 검사 맡자, 이론 책 어디까지 했지 갖고 와봐라... 피아노 학원은 지루했다. 급기야 학원에 간다 해 놓고 안 가는 날이 생길 지경이었다. 엄마에겐 에둘러댔다. 학원이 오늘 문을 닫았더라는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엄마는 나의 거짓말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면서도 나를 그 자리에서 꾸짖지 않았다. 얘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구나,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 얘길 엄마가 해주기 전까지 나는 엄마를 완벽히 속였다며 안도하고 있었다.


바이엘 하권을 끝냈고 체르니 100과 하농을 시작할 무렵, 엄마는 내게 피아노 학원에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피아노 인생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때 엄마가 피아노 학원에 나를 보내는 대신에 나를 직접 가르쳤다면 어땠을까? 피아노 앞에서의 엄마는 그 누구보다 엄격했으니까 눈물깨나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피아노 학원에 가는 것보다는 더 즐겁게 피아노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집에서 바이엘 하권의 실력으로 피아노 의자에 엄마와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젓가락 행진곡은 정말 재밌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피아노로 찬송가를 연주할 때 옆에 앉거나 서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도 좋아했다. 어느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처럼 기억되는 피아노 앞에서의 합창. 초등학생 때였을텐데도 나는 그 순간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피아노 앞에서 엄마와 함께 부르던 찬송가 중 내가 가장 신이 나서 불렀던 찬송가는 199장, '나의 사랑하는 책'이었다. 경쾌하고 밝은 멜로디가 우선 마음에 들었고, 노랫말이 꼭 나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아 몰입이 쉬웠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이 성경에 쓰여 있고 '내가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나의 일기장 어딘가에 쓰여 있을 것만 같은 문장이었다.


199장 찬송은 자연스레 주일학교에 들고 다니는 나의 성경책을 떠오르게 했다. 처음엔 다른 친구들이 들고 다니는 성경책과 똑같이 시커먼 벽돌 같이 생긴 책이었다. 엄마는 내가 성경책에 좀 더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성경책 커버를 만들어 주었다. 재봉틀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손바느질만으로 완성한 성경책 퀼트 커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배경에 귀여운 (부활절) 토끼 그림, 그리고 단추 덮개가 도드라지는 디자인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책은 엄마의 북커버로 더 특별해졌다.


주일학교에서 나는 자랑스레 성경책을 꺼냈고, 괜히 성경책을 만지작거렸다. 정을 붙여 보려고 형광펜을 죽죽 긋고 스티커를 붙여가면서 목사님의 설교에 집중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라 그 안에 담긴 말씀이 진리라 생각하진 못했고(그렇게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건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였고) 성경을 그저 다른 이야기책들처럼 대했다. 드라마틱한 사건들 위주로 읽고 기억했다. 그 때문에 나중에 머리가 크고서 성경을 조금 깊게 읽어보려 했을 때는 '나의 사랑하는 책'을 대하는 자세부터 바꿔야 했지만, 엄마가 퀼트로 이쁘게 꾸며준 성경책과의 교류는 미숙한 신앙의 증거물이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틈글집3 연재 누끼 이미지 (1).png 성경책 커버를 고정하던 단추는 떨어졌지만 나머지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퀼트(quilt)는 언젠가부터 엄마가 취미 삼아 배운 기술이었다. 손이 워낙 섬세한 사람이라 초급반 하나만 이수하고서도 쿠션, 파우치, 휴지걸이, 담요, 슬리퍼... 뭐든 뚝딱 만들어냈다. 퀼트에 관한 엄마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기억된다. 엄마는 대형서점에 가서 꼭 미국이나 일본에서 펴낸 퀼트책을 살폈다. 그때마다 왜 우리나라엔 이렇게 이쁜 천을 팔지 않는지를 투덜거렸다. 그러고선 퀼트책에 수록된 도안과 천들의 조합을 가장 많이 참조해 엄마만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작업 장소는 거실 텔레비전 앞 소파였다. 한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바느질 선을 그리고 실을 골랐다. 시장이나 퀼트숍에서 사 온 천은 그날 곧바로 찬물 샤워를 했는데, 덕분에 화장실이 알록달록한 천으로 가득했다. 그 천들을 구경하면서 변기에 앉는 시간은 묘하게 재밌었다. 골무, 옷침핀, 다리미, 단추나 고리 등 각종 부자재들이 담긴 통은 어느 인형 놀이의 소품함처럼 알록달록해 이뻐 보였다. 내가 쓸 것도 아닌데 그 통을 괜히 꺼내가지고 구경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손바느질로 만든 물건의 매력은 불완정성에 있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 실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분명 자로 안내선을 긋고서 바느질을 했더라도 삐뚤빼뚤할 때도 있었고 실이 길었다가 짧았다가 뒤죽박죽일 때도 많았다. 엄마가 만들어준 물건들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 매력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그게 부끄럽다면서 어서 재봉틀을 배워야 하는데,라고 했지만 나는 그 삐뚤빼뚤한 바늘길이 더 맘에 들었다. 엄마의 호흡, 시간, 손길이 더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사람이니까, 우리가 만든 물건도 우리를 닮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바늘길은 고속도로보다는 우회로, 자동차 도로보다는 차 없는 산책길 같았다. 삐뚤빼뚤하고 불완전하여 다른 길을 이용할 때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그 때문에 힘들 수도 있지만, 어쩐지 몰입이 쉬워지고 기분 전환이 용이한 길. 손으로 만든 물건엔 인생의 교훈이 담겨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퀼트는 여전히 엄마의 취미로 남아 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늘구멍에 실을 끼우는 기계(이거 정말 신박하다)를 사용한다는 것,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바느질을 한다는 것, 그리고 바늘길이 이전보다 훨씬 더 삐뚤빼뚤해졌다는 거다. 시장 가서 사는 이쁜 천도 있지만 인테넛으로 천을 사는 일이 더 잦아졌다(그를 위해서 엄마는 아마존 쇼핑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퀼트 작업의 장소는 언제나 거실 텔레비전 앞이다. 무언가 뚝딱 만들어내는 솜씨도 어디 안 갔다. 아빠와 내가 너무 잘 들고 다녀 해진 퀼트 작품들은 엄마의 A/S 서비스를 받는다. 컵받침이나 조리개(파우치)를 주변에 자주 선물한다(인기 만점이다).


가끔 엄마는 투덜댄다. "이제 그만해야지, " 하고. 그래 놓고서 또 바늘을 든다. 여행지에서 어쩌다 퀼트숍을 발견하면 한번 가보자고 눈을 반짝인다. 친한 친구의 출산 소식을 전하면 "이불 하나 만들어 줘야겠다!" 하면서 천을 고르러 간다. 불시에 내게 새로 만든 물건을 선물한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쁘게 만들었어, 그지?" 하면서. 분명 불완전한 물건인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란 생각이 그 물건을 완전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매일, 가방 속에 엄마의 손이 몇 시간 동안 만지작 거렸던 퀼트 작품을 들고 다닌다. 그러면 혼자 걷는 길도 엄마와 함께 걷는 길로 바뀐다. 외로울 새가 없다.


엄마에게 피아노 수업은 듣지 못했지만 퀼트 수업은 지금이라도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집에 쌓아둔 퀼트 천들을 보면서 나도 한번 삐뚤빼뚤한 길을 갈고닦아 보고 싶어졌다. 엄마는 그때마다 "너는 좀 더 활동적인 거 해. 할머니들 하는 거 하지 말고."라고 한다. 그래도 막상 옆에 붙어서 볼을 비벼대며 애교를 떨면 가르쳐 주지 않을까?


엄마의 바늘이 지나갔을 삐뚤빼뚤한 길을 나도 걸어보고 싶다.

함께 더 오래 걷기 위해. 엄마를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틈글집3 연재 누끼 이미지.png


keyword
이전 09화모스크바엔 없을 모스크바 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