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오너먼트
자동 응답 메시지/전주현
삐-밤새 함박눈이 내렸는데도 아침 아홉 시가 되도록 발자국 하나 보이질 않는 길이 있을 거야. 네가 일어나기 전에 그 위를 뽀드득 걸어가고 있을게. 일전에 네가 거미줄 같다고 했던 내 신발 밑창 자국 기억하지? 눈길 위에 그 거미줄이 잔뜩 보일 거야. 자국이 이어지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와. 내가 먼저 걸어서 미끄럽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을게. 군고구마 껍질이 검붉게 탈 때까지. 전나무를 휘휘 감은 꼬마전구들이 빛의 아리아를 완창 할 때까지. 아, 메리 크리스마스!
추석 연휴가 지나고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나는 겨울 준비에 돌입한다. 스웨터와 목폴라 티를 옷장 앞쪽에 배치하고, 인터넷으로 핫쵸코 분말을 한 통 주문한다. 그리고 베란다에 있는 벽장으로 가 나무를 꺼낸다.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벽장 속 나무는 바깥의 나무들과 다르다. 숨을 쉬지 않는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의 옷을 입은 척해보려고 나뭇잎과 가지 모양이 제법 제각각이고 전체적으로 초록빛을 띠고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벽장 속 나무는 숲의 숨을 내뿜지 못한다. 분명 지난겨울에 큰 봉투에 담아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보관했는데도 어쩐 일인지 나무의 가지마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다. 어느 틈을 비집고 눈처럼 쌓인 먼지일까. 설마 나무가 뿜어냈을까. 그렇다면 이 나무는 숨을 쉬고 있는 걸까. 그럴 리 없는데. 마스크를 쓰고서 먼지떨이로 나무를 빗고 쓸어내린다.
나는 엄마를 보며, 엄마를 따라, 매해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몄다. 엄마는 여행지나 출장지에서, 길 가다가 우연히 하나둘씩 사 모은 오너먼트를 잔뜩 갖고 있었다. 색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그런 오너먼트가 잔뜩 걸린 우리 집 트리를 나는 세상에서 제일 이쁜 나무라 불렀다. 하나의 콘셉트로 묶인 오너먼트 세트로 장식한 나무가 아니란 점이 나의 마음을 샀다. 마네킹에 입혀둔 옷을 그대로 사서 입거나 여기저기서 이쁘다고 호들갑을 떠는 유행을 따라가는 옷차림이 아닌,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들을 자연스레 믹스 매칭한 듯한 모습. 우리 집 트리의 매력은 오너먼트의 다채로움에 있었다.
소녀와 소녀, 산타 할아버지, 동그랗고 매끈한 볼, 황금빛 종, 나팔 부는 천사, 십자가,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의 모습, 어느 관광지의 모뉴먼트가 그려진 장식, 꽃, 화려한 장식의 구두, 복슬복슬한 순록과 생쥐, 호두까기 인형, 붉은색 양말, 장난스러운 표정의 광대, 눈사람, 진저브래드맨, 피아노 치는 생쥐, 자수가 돋보이는 세잎클로버, 어린이의 그림이 그려진 볼... 우리 집 트리 가까이에 서서 오너먼트를 살피면 동화책을 여러 권 읽은 듯했다.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는 엄마가 내게 물려주겠다고 말한 최초의 물건이었다. 어렸을 땐 엄마의 그 말에 '이 이쁜 장난감들이 언젠가 다 내 것이 된다니!' 하면서 헤벌쭉 웃기만 했는데, 지금은 달콤 씁쓸한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은 듯이 반응하곤 한다. 물려받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으면서도 그 일을 내가 막을 수는 없단 생각에 조금 울적해한다. 그러다가도 입을 꾹 다물고 다르게 생각해보려 한다. 물려받을 수 있다면 감사하지, 그렇게 대를 이어서 이야기와 전통을 지키면 되지, 하고서.
오너먼트로 가득한 상자만 집에 벌써 2.5개나 있다. 하지만 나는 겨울마다 우리 집 트리에 어울리는 오너먼트를 찾아다닌다. 혹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카드를 꺼내든다. 엄마가 물려줄 이야기와 전통을 업데이트하기 위해서, 그리고 맘에 쏙 드는 '다윗의 별'을 찾기 위해서다. 다윗의 별은 트리 꾸미기의 하이라이트다. 아기 예수님이 오신 날, 하늘을 밝혔던 별빛을 떠올리며 트리의 맨꼭대기 가지에는 늘 별 모양의 오너먼트를 다는데, 2.5개의 박스 안에 있는 별들 중 그 어느 것 하나 100% 맘에 드는 게 아직 없다.
노란색 천으로 된 별은 분실했고, 같은 크기인데 은색 천으로 된 별은 외양이 다소 볼품없다. 어쩌다 선물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에 붙어 있던 별은 너무 크고 반짝임 정도가 과해서 때로 기품이 없어 보인다. 태양계를 담고 있는 듯한 철제 별은 진초록의 트리 색에 묻혀 눈에 잘 띄지가 않는다. 너무 무거워서 맨꼭대기 가지의 등을 굽게 하지 않으면서도 멀리서 한눈에 들어오는 밝은 별. 그 별을 엄마와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매해, 맘에 쏙 드는 다윗의 별을 구할 수 없을까 하면서 오너먼트 가게를 둘러본다. 그러다가 덥석, 별 모양이 아닌 오너먼트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세상에서 가장 이쁜 나무에 꼭 어울리는 장식이라면서.
벽장 속 나무를 거실로 가져온 다음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장 먼저 나무를 지탱하는 삼각대를 조립한다. 나사만 몇 번 돌렸을 뿐인데 벌써 내 키만 한 나무를 지탱할 뿌리가 생긴다. 국기봉처럼 생긴 구멍 안으로 먼지를 털어낸 나무를 차곡차곡 꽂는다. 밑동부터 꼭대기까지, 전체적으로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3단 구성. 나무는 잠깐동안 레고처럼 조립된다. 거실에 우뚝 선 나무를 올려다본다. 벽장에 구겨 넣은 모양 그대로 삐쭉 말라 있는 게 영 볼품없다. 나무를 그럴싸해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풍성한 침엽수처럼 보이도록 철사로 된 나무의 가지를 하나씩 삼각대 방향으로 내린다. 가장 아래쪽 가지는 최대한 지면과 수평을 이루도록 하고, 위로 갈수록 가지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을 수 있도록 한다. 아까보다 보기 한결 낫다. 하지만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잔가지들을 만져 주어야 한다. 삐죽삐죽, 가지들이 제각각의 방향을 갖도록 잔가지를 이리저리 벌린다. 자연은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으니까 기왕이면 불규칙적으로, 손이 가는 대로 잔가지를 매만진다. 살아 있지 않은 나무를 나무답게 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품이 꽤 든다. 이때 까슬까슬한 나무 잎에 손이 자주 다친다. 숨 쉬지 않는 나무이긴 하지만 조심히 다뤄야 한다. 잔가지 정렬까지 마쳤다면 나무에 가까이 갔다가 나무에서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며 나무의 조형미를 살피며 가지 모양을 수정한다. 플라스틱 나무 한 그루를 거실에 두고서 '숲을 보고, 나무를 보는 시간.' 여기까지 왔다면 그다음은 축제다.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나무 주변을 빙빙 돌면서 꼬마전구를 두르고 가지마다 오너먼트를 걸 차례다.
옷장 위 박스 2.5개를 거실로 대령한다. 박스 뚜껑 위에도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 손으로 대충 툭툭 털어 내고 박스 안을 살핀다. 알록달록, 제각각의 미모를 뽐내는 오너먼트가 한가득이다. 수년간 모아 온 것들이라 모두 나무에 장식할 순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많아졌다. 올해는 어떤 오너먼트를 걸까, 하는 고민이 시작된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엄마는 벌써 볼 하나를 집어 가지에 걸었다. 엄마가 이렇게 시작을 끊어주면 그다음은 오히려 쉽다. 우리는 나무 꾸미기에 몰두한다.
"뭘 또 그렇게 힘든 일을 하노." 엄마와 내가 이렇게 한참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있을 때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가 방으로 들어가는 중에 우리를 보고 한 마디 한다. "아빠, 이건 어디다 달까?" 하고 괜히 붙잡으면, "니 좋을 대로 해라." 하며 방임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장식을 완성하고 트리 점등식을 할 때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나무 앞에 다가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빠다. 그게 아빠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일지도 모르니 받아주기로 한다.
해가 바뀌고 설 연휴가 끝날 때까지 크리스마스트리는 우리 집 거실을 지킨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무 밑이 선물 상자로 북적북적하다. 엄마와 내가 가족을 위해 준비한 것들인데, 25일 성탄 새벽 기도를 다녀온 뒤에 24시간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집에 돌아와 뜯어보는 게 관례다. 가끔 얼른 선물을 전달하고픈 마음에 25일이 되기도 전에 선물 개봉식을 갖기도 한다. 그럴 때면 25일 아침에 왠지 허전하여 케이크라도 한 조각 썰어 먹자면서 찬장에서 접시를 꺼낸다(이때 기왕이면 접시도 붉고 푸른 크리스마스 접시에 케이크를 담는다). 이전에는 파리바게트의 초콜릿 케이크를 먹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우리나라에도 독일의 크리스마스 전통빵인 슈톨렌(Stollen)이 들어와 요즘엔 미리 주문한 슈톨렌을 얇게 썰어 먹는다.
24시 해장국 집의 25일 / 전주현
새벽 예배가 끝나자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넷이서 일제히 한 차에 올라타는 걸 보니 가족인가 봐. 밥을 먹고 들어가자는 의견에 두리번거려 보니 24시 해장국 집에 불이 켜져 있어. 저기 어때. 뜨끈하니 괜찮겠는 걸. 이윽고 딸랑- 하는 종소리가 가족의 입장을 반겨. 해장국 네 개 주세요 하는 아빠와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는 사장님. 남매는 예배당에서의 기도손을 기억하고 두 손바닥을 비비기 시작해. 이렇게 하면 춥지 않아요. 해맑게 웃지. 엄마는 주위를 살펴. 노랫말처럼 오늘이 정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모양이야. 2인 1조의 순찰경찰, 커플, 이제 막 시험을 끝낸 수험생들, 털모자를 푹 눌러쓴 어르신... 공영방송에서 정교하게 설계한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아. 그때 식사 나왔습니다 하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큐 사인처럼 들려. 식탁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가 하나, 둘, 셋, 넷이나 돼. 아빠가 말없이 숟가락을 들 때 사장님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퇴장 인사를 하셔. 남매는 장난을 멈추고 엄마는 사장님께 목례를 해. 딸랑- 손님이 또 들어와.
거실 조명은 옅은 걸로 골라 켜고 대신 크리스마스트리 조명을 키운다. 무언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크리스마스도 곧 끝나니 이젠 내년을 준비해도 되겠구나, 올 한 해도 수고 많았어, 올해 마지막 달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는구나... 그러는 중에 케이크 한 조각의 효과로 잠깐 눈이 반짝 해져서는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해 주는 해리포터 영화의 한 장면을 챙겨 본다. 그러다가도 새벽 기도의 여파로 침대 위로 다이빙 한다. 성탄 예배까지 한두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어 좋다면서 곯아떨어진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준비하는 시간.
베들레헴의 기적을 기억하며 가족과의 시간을 준비하는 시간.
한 해의 마침표를 연습하고 새 해의 첫 페이지를 준비하는 시간.
내게 이보다 더 설레는 시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