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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엔 없을 모스크바 모자

귀 덮는 모자

by 프로이데 전주현

바람이 뾰족해지고 피부가 거칠어지는 계절이 오면 아빠의 코트 주머니 한쪽이 불룩해졌다. 무엇이 들었냐고 물으면 아빠는 손을 주머니 속으로 쑥 집어넣고서 자랑스레 말했다.


"최고로 좋은 모자!"


모자는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주홍색이었다. 각이 잡혀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 쉽게 구겨지고 펴지는 재질이었다. 털이 부들부들한 게 미용을 잘 마친 푸들 같았다. 구피(Goofy)의 귀처럼 길게 늘어진 날개가 달려 있었다(나는 이 모자에 구피 모자란 별명을 붙였다). 우리가 흔히 군밤 모자라 부르는 귀 덮는 모자였다. 아빠가 언젠가 국회에서 열린 작은 장터에서 싸게 샀다는데, 산악회 모임 때마다 챙겨 다닌다고 했다.


아빠는 모자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모자를 쓰는 것도 벗는 것도 아니고 머리 위에 슬쩍 얹어 놓았다. "좀 더 꽉 눌러쓰지 왜, "라고 물으면 답답해서 싫다고, 살짝 걸치는 정도로도 충분히 따뜻하다고 했다. 머리가 바나나처럼 길쭉하고 귤처럼 불룩해 보일 텐데도 아빠는 본인만의 스타일링을 고집했다. 그 때문에 엄마는 틈만 나면 그 모자를 다른 모자로 바꾸고 싶어 했다.


그러나 최애 모자의 입지는 확고했다. 엄마가 아무리 좋은 모자를 사줘도 아빠는 주홍색 모자만을 주머니에 넣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가는 기차를 타려고 아빠는 지하철을 탔고, 가방이 꽤 무거웠던 터라 모자와 몇몇 선물을 담은 짐꾸러미를 좌석 위 선반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 짐을 지하철에 두고 내렸다. 기차에 타서는 아차 싶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분실물센터에서도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아빠는 최애 모자를 잃어버렸다.






겨울마다 아빠의 머리가 주홍색으로 덮이는 걸 지켜본 입장이라 나도 괜히 아쉬워졌다.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새 물건을 산다고 해서 고스란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성품이라 하더라도 나와 연을 맺고 부닥치던 물건은 그 물건 하나뿐이니까. 구피 모자를 잃어버린 후로 아빠는 모자 유목민이 되었다. 이것저것 써보면서 길들일 만한 녀석인지 가늠해 보았다. 엄마와 내가 아빠의 생일 때마다 겨울 모자를 선물한 것도 한몫했다.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그런데 그 어느 모자 하나, 구피 모자처럼 사랑받진 못했다. 그중엔 아빠가 최애 모자를 잃어버리기 전에 엄마가 아빠에게 선물한 모자도 있었다. 콜롬비아 스포츠(Columbia Sports)에서 만든 모자였다.


유독 부피가 큰 그 모자를 나는 모스크바 모자라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에서 쓸 것만 같은 모자란 생각에 자연스레 그렇게 불렀다(그도 그럴 것이 모스크바 모자는 털장식이 엄청 많았다). 그 얘길 듣더니 엄마도 그 모자를 러시아 모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모자에도 날개가 달려 있었다. 구피 모자와 달랐던 건 늘 귀가 아래로 처져 있지 않았다는 거였다. 상황에 따라 귀를 덮을 수도 안 덮을 수도 있었다. 어느 스타일이건 간에 모스크바 모자를 머리에 쓰면, 그 순간 얼굴이 주먹만 해졌다. 보온 기능 하나는 정말 훌륭했다. 하지만 인형탈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부피가 너무 컸다. 함부로 구기기도 어려웠다. 털 장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름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둥그렇게 모양이 잘 잡혀 있어야 태가 나는 모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가볍게 주머니에 툭 넣었다가 꺼내 쓰기엔 너무 고급스러웠다.


아빠는 모스크바 모자를 쓰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빠가 모스크바 모자를 선물 받았을 때, 나는 정통 사극에 푹 빠져 있었다. 역사의 스토리텔링에 푹 빠져서 수능 사회탐구 선택 과목을 3사(한국사, 근현대사, 세계사)로 하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 조선시대 사극을 많이 봤다. 권력 다툼을 하는 게 흥미롭기도 했지만 당시 여인들의 복장과 장신구에 관심이 눈이 갔다. 금박이 놓인 당의를 입고 가채를 올린 궁중 여인들의 모습은 신비로웠다. 땋은 머리에 비녀와 팔랑팔랑이는 장신구를 꽂아 놓은 가채 스타일링이 분명 우리 역사 속 풍경일 텐데도 이국적이라 느꼈다. 얼굴이 작아 보이게 하고 가채의 주인에게 집중하게 하는 몸치장 같았다. 묘하게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빠의 옷장에서 나뒹굴고 있는 모스크바 모자가 떠올랐다.


"아빠, 이거 나 써도 돼?"

"그래라."


한동안 모스크바 모자를 내방 옷걸이 맨 위에 걸어 두었다. 홀로 사극놀이를 할 때 슬쩍 써보기도 하다가, 추운 겨울날에 챙겨 입은 스웨터와 색이 잘 맞겠다 싶으면 수고스러워도 괜히 갖고 나갔다. 물건을 쓸수록 정이 들기 마련이니까, 내가 재미있게 모스크바 모자를 쓰면 아빠도 언젠가 최애 모자를 마음속에서 보내주고 새로운 모자를 들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스크바 모자를 쓰면 쓸수록 최애 모자가 더 자주 생각났다. 내가 모자의 주인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쉽게 이별한 대상을 삶에서 완전히 지우기란 불가능한가 보다.




아빠의 생일은 12월 31일을 단 며칠 앞두고 있다. 억울하게 한 살 더 먹는 아빠를 위해, 매해 겨울, 나는 괜히 모자 진열대를 살핀다. 집에 이미 모자가 많은데도, 혹시나 싶어서 구경을 한다. 구피 모자를 닮은 모자가 있을까 싶어서. 아빠의 최애 모자가 사라져 생긴 구멍을 좀 더 꽉 채워줄 만한 모자를 이번엔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모스크바 모자는 우리 곁을 지키고만 있다. 밖에 자주 쓰고 나가지 않으니 잃어버릴 확률도 낮다. 많이 쓰지도 않아서 여전히 새것 같다. 아마 오래오래 곁을 지키고 있을 거다. 그럼 구피 모자의 그림자도 덩달아 우리를 바짝 쫓아오는 게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근데 변수가 생겼다. 언젠가부터 아빠가 내 겨울 모자를 들고 다닌다. 귀 덮는 스타일의 검은색 모자다. 구피 모자보단 두꺼워 휴대성이 덜 좋지만, 제법 심플하고 따뜻한 게 꽤 괜찮은 모자다. 엄마와 내가 선물한 수많은 겨울 모자를 제쳐두고 굳이 내 모자를 뺏어 쓰는 아빠가 재밌을 뿐이다.


"아빠, 그게 맘에 들었나 봐?"

"뭐, 이 정도면 괜찮지."


혹 모스크바 모자가 이 상황을 알고 서러워하진 않을까, 괜히 모스크바 모자의 털을 어루만진다. 여전히 풍성하고 따뜻하다. 올겨울에도 함박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모스크바 모자를 쓰기 좋은 날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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