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브로치
뾰족한 옷핀의 잠금을 푼다. 옷깃을 통과하는 바늘 코를 보고 있으니 눈이 살짝 찌푸려진다. 그것도 잠시, 핀이 옷을 빼꼼 통과해 나왔다. 잠금장치를 잠그고 고갤 들어 거울을 본다. 제대로 꽂혀 있군. 주로 재킷의 왼쪽 카라 위쪽 또는 심장이 있는 자리에서 조금 위. 고심 끝에 고른 브로치가 반짝인다.
자칫 심심해 보일 법한 옷차림에 브로치를 단다.
어릴 적부터 엄마를 보고 익힌 패션 팁이다.
초등학생 때 혼자서 집을 지켜야 할 날이 많았다. 아빠는 주중에 서울에서 일하다가 주말에만 대구로 내려왔고, 엄마는 저녁 늦게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할 일이 잦았다. 엄마가 직접 연주를 하는 날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나도 여러 번 음악회에 따라갔지만 클래식의 매력을 모르던 때라 집을 지키면서 혼자 투니버스를 보는 게 훨씬 더 편했다. 애니메이션의 황금기라 불리던 90년대였지만 저녁 시간대에 방영하는 것들 중엔 내가 관심 없어하는 것들도 꽤 많았다. 그럴 때마다 TV를 끄고 안방 구석으로 달려갔다. 엄마 몰래 제2의 놀이터 삼은 곳, 바로 엄마의 화장대였다.
주인 없는 화장대를 뒤지며 즐거워했다. 엄마가 사용하는 화장품 통을 하나씩 열어 점검했다. 전문가처럼 역할극 놀이를 했다. "음, 이 립스틱은 색이 너무 진하군요." "이건 꽃향기가 나는데, 저건 아빠가 쓰는 비누랑 향이 비슷해요." 하면서 엄마의 물건을 평가했다. 맘에 드는 것들은 몰래 손등에 발라보기도 했다. 내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어울리진 않았다. 다음 타깃은 첫 번째 서랍이었다. 그곳에는 화장품 샘플과 엄마의 액세서리가 들어 있었다. 비싼 것들은 아니었다. 그저 보기에 반짝이고 이쁜 것들이었다. 엄마는 심미안이 좋은 사람이었다. 비싸지 않더라도 독특하고 재미있으며 활용도가 높은 패션 소품이 보이면 하나둘씩 사모으는 재주가 있다. 그렇게 모은 물건들이 첫 번째 서랍에 수두룩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물건은 브로치였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이 엄마는 상황에 맞게 옷을 갖춰 입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이나 선생님들 앞에 나설 일도 많았던 터라 항상 단정히 입고 다녔다. 옷장 가득 들어선 투피스와 원피스, 정장 바지, 그리고 화장대 가장 아래서랍에 들어찬 스타킹들도 엄마의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또 엄마는 마냥 점잖기만 해서는 '재미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단정한 옷차림에도 한 두 가지 포인트를 주길 즐겼는데, 그때 사용하는 갖은 소품들 중에 가장 간편한 소품이 바로 브로치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아기자기한 것들. 오래된 것들. 사연 있는 것들이었다. 크리스털로 번쩍이는 헬로키티 얼굴 모양의 브로치도 있었고(어릴 땐 그게 제일 탐났다), 자개 느낌이 나는 부엉이 한 쌍이 그려진 브로치도 있었고(이젠 이게 제일 탐난다), 꿀벌이나 꽃, 또는 기하학적 무늬가 돋보이는 브로치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주로 코트나 재킷의 카라에 달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블라우스 칼라의 정 중앙, 스카프, 코트에 브로치를 달아 변화구를 주기도 했다. 엄마의 브로치 활용법은 무궁무진했다. 브로치 종류에 따라 잠금 방식도 다양했다. 클립형, 자석형, 옷핀처럼 그냥 꽂아 넣는 방식... 그중에서도 나는 빗장을 풀듯 옷핀 주변을 두르고 있는 동그란 잠금장치를 밀어내는 방식의 브로치를 좋아했다. 브로치를 옷에 꽂고 옷에서 빼는 방식이 퍼즐을 닮았다며 재밌어했다.
브로치를 단 엄마의 모습은 당차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막연히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 직장에 다니면 저렇게 재미있게 입고 다닐 수 있겠구나. 그렇게 커리어 우먼의 꿈, 정확히는 커리어 우먼의 코디를 꿈꿨다. 엄마가 연주회 일정으로 집을 비운 날마다 투니버스를 봐서 만화력이 한껏 올라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가끔은 엄마의 브로치가 해적 선장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짝꿍 앵무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엄마는 브로치와 짝을 이루며 밖을 돌아다니다가,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속마음을 브로치에겐 털어놓는 게 아닐까? 브로치엔 엄마가 애써 숨기는 표정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는.
좋든 싫든 딸은 엄마를 봤다. 관찰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엄마를 닮아갔다.
그래서 그런지 또래 친구들에 비해, 나의 화장대 서랍에도 브로치가 여럿 놓여있다.
여행지에서 어쩌다 발견한 브로치를 발견하면 가던 걸음을 멈춘다. '어디 엄마 줄만한 거 없나, ' 하고 보다가 '이건 내가 해도 되겠는데?' 하는 생각도 한다. 엄마가 최근에 브로치 하고 외출하는 모습을 언제 봤더라 하는 질문도 따라온다. 그렇게 영국 그리니치에서, 도쿄의 어느 쇼핑몰에서, 그러고 나서도 여러 번... 엄마를 위한 브로치를 사 왔다.
반대로 엄마가 내게 브로치를 선물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갔던 유럽 가족 여행 중이었다. 엄마와 벨기에 브뤼셀의 그랑 팔라스를 구경하다가 한 가게로 들어갔다. 레이스 상품을 파는 가게였다. 화려한 레이스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와중에도 엄마는 매의 눈으로 이쁜 브로치를 하나 발견했다. 금박 리본 장식에 동그란 펜던트, 그 안을 장식한 레이스 공예가 돋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리본 장식 아래 부분이 달랑달랑 거리는 게 귀여운 인상을 주기도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리가 없군. 나는 뒷짐을 지고 엄마의 브로치 쇼핑이 끝나길 기다렸다. 귀국길에 브로치가 상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상점 주인이 박스에 고이 포장해 주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엄마가 내게 그 레이스 브로치를 내미는 게 아닌가.
"이건 너 해라."
엄마는 포장지를 살포시 뜯으며 브로치를 내게 건넸다. 엄마는 늘 이런다. 자신을 위해서 산 것을 내게 줘버린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그러면 엄마는 당차게 답한다.
"엄마는 많아. 블라우스 입고 그 위에 재킷 입을 때, 색 어울리는지 확인하고 달아봐."
어쩌다 손에 받아 든 레이스 브로치는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반짝여 보였다.
그러고 나서 또 나중. 어김없이 브로치를 달고 외출하는 엄마를 보고서 "아 이쁘다, " 했더니 엄마가 대뜸 말한다. "나중에 너 다 물려줄게." 갖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묘해져서 대뜸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물려주더라도 아주 나중에 물려줘. 오래오래 엄마가 브로치 차고 외출하는 모습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엄마 덕에 브로치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 원하던 면접 자리엔 '용기'의 기숙사 그리핀도르의 배지를 달고 가기도 했고, 축가를 부르는 자리엔 신부의 드레스를 닮은 레이스 브로치를 달았으며, 어린 학생들 앞에서 독일어 강의를 해야 할 땐 독일 로텐부르크에서 사 왔던 테디베어 브로치를 옷깃에 꽂았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브로치 굿즈를 판매하는 매대를 발견하면 부리나케 달려가 뒷짐을 지고 구경을 한다. '어디 엄마한테 어울릴 만한 게 있나, ' 아님 '나 쓸만한 게 있나, ' 하고.
엄마가 꽂고 다니던 브로치가 엄마의 비밀 짝꿍 같았다면 내가 꽂고 다니는 브로치는 좀 다르다. 나의 브로치에는 엄마를 생각하며 조금 더 씩씩하게 하루를 보내자는 주문이 담겨 있다.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어쩌다 나를 만난다면, 그리고 이 글을 기억한다면, 그날 내가 가슴팍에 뭔가 꽂고 나오진 않았는지 눈여겨보길 바란다. 아마, 그날의 기분, 날씨, 약속 장소나 만나는 사람에 맞게 준비한 무언가일 거다. 그리고 그날, 나는 엄마와 함께 걷는 마음으로 외출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