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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끌어안는 마음

유단포와 리본끈

by 프로이데 전주현


유럽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다. 몇몇 페트병의 음료 뚜껑이 눈에 들어온다. 다르게 생겼다. 병에서 똑 분리되지 않는다. 병의 주둥이를 두른 뚜껑의 동그란 지지대 부분에 붙어 있다. 아, 이러면 뚜껑을 잃어버릴 일이 없겠구나. 무심코 땅에 버려져 야생동물들이 주워 먹는 일이 생기지도 않겠구나. 그런데 조금 불편하기도 하다. 음료를 마시는 구멍이 활짝 열리지 않은 괜히 찝찝하고, 병 하나를 사서 너와 나 이렇게 나눠 마실 땐 다른 한 손으로 뚜껑을 젖히는 데 힘을 좀 써야 한다. 음료를 다 마시고 뚜껑을 닫을 때, 아구를 맞춰 뚜껑을 닫기가 쉽지 않다. 혹 뚜껑과 병 사이에 약간의 틈을 허락한 채 페트병을 백팩에 넣었다간 등이 금세 축축해지고 만다. 익숙한 게 최고라고, 한국의 페트병 음료들을 떠올린다. 따닥하는 소리를 신호탄 삼아서 드르륵 돌려 마시는 음료, 동그란 입구를 입으로 감싸고 왈칵 들이붓는 음료. 병뚜껑 하나로도 향수병이 도진다.


그런데 뚜껑이 본체에 꼭 붙어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 아빠의 사랑이 묻어나는 물건이다.





유단포(ゆたんぽ)라고 아시는지. 일본어 표현이 낯선 이에겐 보온물주머니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우리 가족이 애용하는 보온 아이템이다. 금속이나 고무, 도기로 된 주머니에 뚜껑이 달려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뚜껑을 통해 뜨거운 물을 채워 넣고 식은 물을 버린다. 여러 번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이다. 유단포를 품에 안고 있으면 애교 많은 반려동물을 무릎에 올려둔 것처럼 몸이 포근해진다.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우리 집엔 너 다섯 개의 유단포(독일의 파쉬(Fashy) 제품과 우리나라의 JAJU 제품이 뒤섞여 있다)가 있는데, 모두 고무로 된 것들이다. 주머니 주변엔 보들보들한 커버가 씌워져 있다. 고무는 열전도율이 높질 않은가. 뜨거운 물을 주머니 안에 넣고서 주머니를 맨살로 끌어안고 있다간 화상을 입기 쉬우니 안전장치 삼아 씌워둔 천이다. 가끔은 커버만으로도 물 온도를 감당할 수 없어 커버 위에 수건을 칭칭 둘러서 품에 안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주로 겨울에 사용하지만 생리통이 심한 날이거나 몸살 기운이 있을 때도 유단포를 꺼낸다. 그때 발견한다. 유단포의 몸통(주머니)과 뚜껑을 연결해 놓은 리본끈을. 아빠의 작품이다. 어쩌다 받은 선물들을 이쁘게 장식하고 있던 리본들을 재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유단포의 커버나 몸통 색과 어울림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포장끈이었던 거라 이쁘거나 광택이 난다. 유단포 사용법의 첫 번째 단계는 아빠가 매둔 끈이 잘 묶여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부터다.


그다음은 물 끓이기인데, 이때 선택의 기로에 선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유단포를 좀 더 오랫동안 데우는 주전자 물을 끓일지, 유단포가 금방 식긴 하지만 준비 과정이 간편한 포트 물을 끓일지. 나는 기다리는 게 싫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따뜻한 걸 품에 안고 있고 싶어서, 포트 물을 애용한다. 아빠는 주로 주전자 물을 끓인다. 오래오래 따뜻하게 해주는 게 더 중요하단다. 그러니 잠깐의 기다림과 불편함은 감수하겠단다. 역시, 이래서 내가 아빠한테 아직 안 된다.





우리 가족은 일찍이 따로따로 잤다. 서로의 생활 리듬이 너무 다르기도 하고, 잘 땐 혼자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얼리버드라 자정이 넘도록 깨어 있는 때가 거의 없었는데, 엄마와 나는 각자의 취미나 일정으로 새벽 한두 시까지 바빴다. 그러니 1등으로 방에 자러 들어가는 사람은 늘 아빠였다. 방 불이 꺼지고 라디오 소리가 들리면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침대에 누웠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코골이 소리까지 들리면 아하 역시! 하고 무릎을 탁 쳤다. 온 집이 조용해지는 건 엄마와 내가 각자의 이불을 덮고서다. 그때 미세하게 집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낮게 치지직 거리는 아빠의 라디오 소리가 전부다(아마도).


나는 새우잠이 가장 편한 사람이다. 심장이 눌리는 방향으로 누워서 이불을 다리에 돌돌 감았다가 풀면서 잠을 청한다. 엄마처럼 꿈도 잘 꾼다. 액션, 미스터리, 코미디, 판타지, 장르도 제각각이다. 그래서일까, 정말 추운 겨울날이 아닌 이상, 이불을 차고 자는 날이 많다. 사실 겨울날에도 그러고 자다가 밤중에 추워서 잠이 깨고선 다시 이불을 끌어당길 때도 많다. 그때, 얼리버드 아빠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난다. 내가 꿈을 꾸다 말고 이불을 찾아 손을 더듬거릴 때.


아빠는 정찰을 시작한다. 엄마가 누운 곳, 내가 누운 곳을 살피려고 이 방 저 방 문을 연다. 혹시 불을 켜 놓고 자는 건 아닌지, 음악이나 동영상을 켜 놓고 자서 불편하진 않은지, 감기 걸리기 쉽게 이불을 차고 자는 건 아닌지, 드라마틱한 꿈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힘들어하진 않는지, 창문은 날씨에 앎자게 닫히거나 열려 있는지, 침대 옆 협탁 위에 컵뚜껑을 덮은 보리차 한 잔이 잘 놓여 있는지(비어 있는지)… 그리고, 유단포가 필요하진 않은지. 이미 사용하고 있다면, 차게 식은 건 아닌지. 그러고는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이 많이 떠 있는지, 구름이 다 가렸는지, 비가 오는지, 바람이 어떤지… 새로운 하루가 어떨지 생각한다. 꼼꼼하고 애정 어린 정찰이다.


전기장판 없이 그저 중앙난방에만 의존하며 살기에 겨울날엔 ‘유단포 배달 서비스’로 정찰이 좀 더 일찍 시작된다. 아빠가 잠들기 30분 또는 한 시간 전, 가스레인지 위에서 주전자 가득 물을 채운다. 팔팔 끓인다. 그러는 동안 유단포 세 개를 주전자 옆에 늘어놓는다. 그때 아빠 표정이 꽤 엄숙하다(집중해서 그런가). 물이 다 끓었다면 주머니가 65% 정도 차도록 물을 붓는다. 천천히. 조심조심. 뜨거운 물로 고무 주머니가 부풀어 오르면 주머니를 손으로 살짝 눌러 달랜다. 증기를 빼는 작업이다. 피식하는 방귀가 새어 나오게 유도하는 것 같아 꽤 재밌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유단포가 너무 뚱보가 되어서 끌어안고 자기가 힘들어진다. 괜히 터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도 들고. 홀쭉한 주머니배로 온수가 찰랑거리게 하려면 피식피식피식 소리를 몇 번 견뎌야 한다. 그러고 나서 리본끈으로 고정해 둔 뚜껑을 세게 닫는다. 이제 남은 일은 각자의 침대 이불 밑으로 유단포를 배송하는 것이다. 엄마 것 하나, 내 것 하나, 아빠 자신 것 하나… 배달 끝에 기도도 덧붙인다. 따뜻하게 자길. 편하게 자길. 기분 좋게 자길. 아프지 말고 자길.


아빠가 챙겨 준 유단포를 안고 누우면 눈이 더 쉽게 감긴다. 하루를 이대로 마무리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자장가처럼 흐른다. 따뜻한 물, 따뜻한 유단포. 그보다 더 따뜻한 건 아빠의 마음이다.






유단포에 메단 리본끈은 유단포를 안고 잔 그다음 날 진가를 발휘한다. 여전히 묵직하지만 차가워진 주머니를 품에서 빼면 유단포의 온기가 밤새 내게 머물다 갔다는 게 느껴진다. 다 쓴 유단포를 화장실로 갖고 간다. 세수를 하기도 전에 유단포의 뚜껑을 열어 툭 떨어뜨린다. 끈으로 주머니에 연결되어 있으니 그래도 된다. 나이스. 잃어버릴 일이 없다. 뚜껑이 허공에서 데롱거리게 내버려 둔 채 유단포의 주둥이(물을 집어넣는 구멍)가 아래로 향하도록 주머니를 뒤집는다. 간밤에 나를 달래주었던 물을 비워낸다. 그리고 그 모양 그대로 수건걸이 모서리에 유단포를 걸어둔다. 정말 편리하군. 유단포를 정리할 때 아빠가 엄마의 유단포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때 별말 없이 세면대에 물을 쏟아부으면서 눈인사를 나눈다. 아빠 덕분에 따뜻하게 잘 잤어, 하고서.


페트병에서 똑 떨어지지 않는 뚜껑은 절반만 반갑다. 하지만 아빠가 달아준 유단포 뚜껑은, 우리 가족 한정, 특허감이다. 아빠처럼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유단포를 채우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평안한 밤을 생각한다면 그 과정이 절대 귀찮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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