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 겸손한 유럽연합의 행정 수도, 브뤼셀 산책
17.03.10 금요일
며칠간 봄날 같더니 날씨가 또 말썽이다. 바람이 세게 부는 바람에 빗질을 끝낸 머리가 산발이 된 채 강의실에 도착했고, 연약 하디 연약한 휴대용 우산은 그간 몇 번이고 까뒤집혔다. 교수님은 강의실로 들어오시면서 '벨기에 날씨를 즐기고 있나요들?"하고 물으셨다. 여기서 벨기에 날씨란 변덕스럽기 그지없고 해는 잠깐 비추는 듯 말 듯 하더니 쏙 사라지는 아주 얄미운 날씨다.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아침 수업 후 주말 티켓(weekend ticket)을 끊어서 M을 만나러 브뤼셀행 기차에 올랐다. 며칠 전부터 M이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의 방문자 센터 겸 박물관과도 같은 Parlamentarium이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함께 현장학습 겸 구경을 갈 예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M과 나는 전공이 같다.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공부했다는 이력도 같다. Parlamentarium을 방문하기에는 M만 한 친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arlamentarium은 일종의 이야기집 같은 곳이었다. 유럽이 겪었던 역사가 어떻게 오늘날의 유럽연합으로까지 이어졌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하는 곳이었다. 피해자 코스프레도 우월감에 찬 리더 의식도 없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역사 앞에 겸손한 유럽연합의 모습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그게 전부였는데 괜히 감동이었다. 절제된 연출만이 선보일 수 있는 감동이란 게 있었다.
전시관을 충분히 관람한 후, M은 기념품점에 들어서더니 대뜸 EU기 대형 사이즈 하나를 주문했다. 25일 로마에서 있을 EU Federalist(federalism/연방주의는 유럽 통합사를 해석하는 주요 흐름 중 하나로 유럽연합을 국가 간의 연합체 그 이상으로 본다. 국가들이 서로의 주권을 EU에 조금씩 양보해 가면서 초국가적인 연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갈 거라 전망한다.)의 행진에 참여할 예정이라며 그때 어깨에 EU 기를 두르고 걷고 싶다고 했다.
브뤼셀은 올 때마다 참 묘한 인상을 풍긴다. 한국인 관광객들에겐 길어야 이틀 정도 머물다 가는 곳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머물며 구석구석 살펴봐도 재밌을 도시인 듯도 하다. 유럽연합의 각종 기구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 외교 지구가 도시의 다양하고도 전문적인 (그리고 부산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정장을 빼입고 직장으로 향하는 영화 속 커리어 맨과 커리어우먼의 풍경은 런던, 파리 그 어느 도시보다 어쩌면 브뤼셀에 어울리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대도시를 둘러싼 혹평 중에는 '회색 도시'라는 오명이 빠지질 않는데 브뤼셀을 두고 그저 회색 도시라고 하기엔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다. 벨기에의 화려한 과거를 보여주는 건축양식들이 꽤 많아서 이따금 형형색색으로 눈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껏 경험한 브뤼셀이 '유럽의 수도'라는 별칭(물론 논란이 많은 별칭이지만)을 담아낼 만큼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고 느껴지진 않지만 그 나름대로 질서와 전통, 변혁이 교차하는 도시임은 틀림없다.
To. Readers
우리에게(uns, [운스]): Parlamentarium을 나서면서 구시가지에 위치한 최애 서점 트로피즘(Tropism)에 들러 꼭 사고 싶었던 로멩 가리/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를 단돈 7유로에 구매했다. 팟캐스트 <빨간 책방>을 통해 소개받은 책 <자기 앞의 생>은 내게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와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해주는 책 중 하나다. 꽤나 좋아하는 소설인지라 불어 말하기 수업 때마다 프랑스 문학 이야기가 나오면 꼭 언급하기도 하는 책인데 선생님께서 초보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용기 내어 사 본 나의 첫 불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