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매거진 Day6
하나를 오래 못한다. 좋아하는 음식은 빠르게 바뀐다. 취미라 무언가를 정하기가 어렵다. 모든 것들이 늘 관심사니까. 그런데 살면서 뭘 꾸준히 했나, 생각해보니 딱 세 가지다. 그 하나하나가 컨텐츠의 핵심 요소더라.
역시 첫 번째는 재수 시절이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수시 발표가 나던 날, 3년 동안 준비했던 게 싸그리 무시당했을 때. 과학과 언론의 조화를 꿈꾸며 과학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싶었다. 준비도 나름 했다고 생각했다. 그저 남들보다 부족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했다.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났을 리가 없다고. 뭐라도 되겠지, 어디 하나라도 가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현실은 차가웠고 난 별 거 없었다.
가만히 고민해봤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저 학교 안에서 비교과 활동 조금 했답시고 으스대는 꼴이었으니까.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사실 존재 자체가 미약했다. 실력이 없는데 어쩌겠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를 몇 날, 정신차리고서 해왔던 모든 수시 활동 기록을 싹다 버렸다. 충격이 세게 들어오니 비로소 자기 객관화가 생겼다. 그리고 재수를 결심했다. 오로지 정시와 논술로만 준비했다. 실패한 지난 날에 다시 기대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학원 개강날부터 수능날까지, 거짓말 안 하고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공부했다. 명절, 휴일 그딴 거 하나도 없었다. 눈이 떠 있는 동안에는 잠도 안 잤다.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그렇게 꾸준히 해낸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평소보다 좋지 않았다. 수능 전날, 고사장을 찾으러 다니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아 감기에 걸렸다. 컨디션 난조에 더해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던 시계 초침 소리(타이맥스 위켄더 너어는 지인짜..)는 가장 중요한 수학 시간에 멘탈을 끝내 부서뜨렸다. 결국 아쉬운 성적을 냈다.
이때의 경험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자산으로 남았다. 첫째, 노력이 전부다. 그게 어떤 방향이든. 물론, 지금이라고 무엇이든 항상 꾸준히 하진 않는다. 다만 자신이 생겼다. 제대로 목표하는 게 생기면 언제든 물고 늘어질 수 있다는 걸.
둘째, 하지만 그게 항상 최상의 결과를 보답해주지만은 않는다. 결과를 내는 건 또 다른 영역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극단의 왕국이니까. 홈런을 칠 생각으로 크게 휘두르면 안 된다. 팔 나간다. 리스크가 커진다는 의미다. 대신, 안타를 여러 번 쳐야 한다. 망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 당시에는 재수에서 모든 힘을 소진해 삼수를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재수의 결과로 간 대학은 충분히 안타였다. 심지어 2루타 정도 된다. 친 건 안타였는데 내가 2루까지 뛰었으니까.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 나가기 나름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부터였다. 옷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냥 잘 입고 싶었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의미를 찾고 싶었다. 사람을 향한 걸 만들고 싶었다. 대중에게 거리가 먼 기술인 전공과 달리, 옷은 우리와 가장 가깝다고 느꼈다.
그래서 빠르게 했다. 처음은 패션 스타트업이었다. 사실 패션이라고 하기 어려운, 마케팅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래도 했다. 나름 거기서 개인 시간을 얻어 패션쇼에 나가 모델들 사진도 많이 찍어보고, sns 관리도 경험해봤다.
다음은 많이 했다. 군대였다. 고민 끝에 디자인을 공부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의경을 나온 덕분에 자유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일단 연필부터 집어들었다. 소묘부터 시작해 마커도 써보고, 아이디어도 시각화해봤다. 짬나는 시간에는 항상 그림을 그렸다. 쓴 종이를 위로 쌓으면 대충 허벅지깨나 올 거다.
마지막은 피드백이었다. 마침 동기 중에 미대를 나온 친구가 있었다.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릴 때마다 찾아가 물었다. 귀차니즘이 많은 친구였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했다. 그 짧은 순간에 여기, 저기, 하며 지적하고는 자러 가더라. 그 친구 덕분에 실력이 빠르게 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운이 좋았다. 올바른 성장을 위한 3요소 - 속도, 양, 피드백을 모두 갖췄다. 솔직히 아직도 그림은 못 그리지만, 아이디어를 세우고 구체화, 시각화하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어느 정도 경험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위의 경험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었다. 바로 연결이었다. 지난 상반기, 66일 동안 습관을 형성하고 인스타에 기록하는 66챌린지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66일 동안 뭔가를 꾸준히 하는 경험 자체에 집중했다. 매일을 기록하고, 반성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같은 해시태그를 걸고 함께 뛰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태해지는 날에는 그들의 피드를 보며 힘을 얻고 고맙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러자 내 피드에도 서서히 응원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내가 했던 것처럼 힘이 되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함께 뛴 덕분에 66챌린지를 완주했다. 모든 날이 성공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그들과 같이 했다는 그 자체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진짜 게임은 그 다음부터였다. 이 챌린지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인연들. 모든 걸 신뢰하는 파트너이자 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인 bk, 언제나 더 나은 오늘을 직접 증명해내는 인사이트 가득한 슈봉 형님, 사람들에게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퍼플 누나까지. 이들을 비롯해, 보다 긴밀하게 신뢰를 다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영역이 확장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한달 플랫폼까지 오게 되었다.
고양의 순간을 함께하는 창의적 공동체. 이들과 신뢰로 맺어진 연결망으로 성장의 속도가 더할 나위없이 빨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게 쭉쭉 뻗어나가고 있다. 드디어 연결의 힘에 눈을 떴다.
다음에는 어떤 터닝 포인트가 더 높은 성장으로 인도할까. 무엇이 됐건, 딱 하나는 확실하다. 꾸준함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걸.